제 3권 : 천지의 본음/1부 1장

자기빛에서 초탈하기

능 소 2022. 8. 16. 14:42




우리 마음이 활동한 정신 정서 감정의 파장에는 우리 내면이 띤 진공빛이 밝기 그대로 전사되어 있게 된다. 그리하여 인생들이 한 생각, , , 그림 등 마음 활동이 만든 저작물들은 그 사람이 띤 빛과 같은 밝기의 빛을 띠고 있게 된다.

 

어떤 생각인지, 무슨 내용인지, 작품성이 어떤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인생들은 이런 것에 의미를 두지만, 빛은 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 사람이 밝은 사람이면 그의 마음 활동이 무엇을 하든 그것에는 빛이 담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 사람이 밝은 빛을 띤 사람이면 그가 구구단을 외워도 그 외운 것에 밝은 빛이 복제되어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밝지 않으면 그가 좋은 말과 글을 이어 거룩하게 만들어도 그것에 밝은 빛이 담기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어 우리 마음이 활동한 정신 정서 감정의 파장에 자기 밝기의 빛이 담기게 되는데, 이 자기 밝기의 빛을 자기 자신이 다시 경험하는 되먹임적인 상황이 연속되게 된다. 이를테면, 자신이 한 생각을 계속하면서 그 생각에 자기로부터 입력된 빛을 경험하게 되고, 또 자신이 가진 어떤 고정 관념을 되풀이 사용하면서 그것에 고착되어 있는 자기 밝기의 빛을 자신이 경험하는 식이다. 이것은 자기 밝기에 정체되어서 대우주의 무한한 빛과 소통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날 때부터 청정한 마음인 양심(良心)이 내면의 빛이 밝은 데서 우러나고, 선험적인 지성인 양지(良知)와 선험적으로 가진 재능인 양능(良能)이 내면의 빛이 밝은 데서 우러나므로 내면의 빛, 곧 자기영광(自己靈光)은 밝아야 좋다.

 

전래되는 말씀에 의하면 인생들은 본디 하늘이 띤 무한한 빛과 같은 밝기였다. 그러나 인생들이 그 빛을 잃게 되었고, 지금과 같이 잠재된 영성이 깨어나고, 영적 진화가 활발하게 일어나기에는 미흡한 밝기이게 되었다. 불경이 말하는 무명(無明)’이고 성경이 말하는 하느님의 빛 없음’(=원죄)가 이것 아니랴!

 

빛이 충분히 밝지 못하면 이제라도 밝아지면 될텐데, 필자가 말하는 빛운영이 가능해지기 전에는 천지나 사람이나 진공빛이 충분히 밝지 못한 상황에 멈춰 있었다. 경전들이 빛에 대해 말했지만 말씀들은 하나같이 설명, 비유, 은유, 상징으로 대신했고 실제의 빛이 밝아지는 변화가 일어나지는 았았다. 빛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도 그 빛 이야기를 들은 때문에 밝음이 증대되는 것은 아니었고, 그 빛이야기를 듣고 생각하고 되풀이 경험하는 것을 통해 자기 밝기의 빛을 경험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실험적 관찰이 가능한 빛현상인데, 인생들이 이 현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런 환경에서 인생들은 충분한 밝기이지 못한 타고난 밝기에 정지되어 있었고, 타고난 자기 밝기만을 경험하며 평생을 살았다.

 

 

폐쇄회로는 임의로 설정한 어느 곳을 관찰 카메라가 촬영하고 그 정보를 외부와 차단된 내부의 수상기로 보는 것을 말한다. CCTV가 그런 것이다. 이와 달리 일반 TV는 개방형이어서 수상기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TV를 시청할 수 있게 된다.

 

빛운영이 가능해지기 전에는 천지나 사람이나 진공빛이 충분히 밝지 못한 무명한 상황에 정지되어 있었고 밝음이 증대되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인생들이 삶에서 경험하는 진공빛의 차원은 그 전체가 페쇄회로적 상황이었다.

 

그랬다가 빛운영이 시작되어 천지와 사람이 띤 빛이 밝아지면서 새로운 밝기의 빛을 접하게 되었으니, 이는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밝기와 소통한다는 점에서 개방형 TV에 비할 수 있다.

 

빛운영으로 천지와 사람들이 띤 진공빛이 밝아지고 덩달아 사람 내면의 빛도 분량이 늘어나서 증대된 빛이 그 사람이 마음 활동하는 것을 통해 마음의 저작물들에 전사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인생들의 관심이 빛에 향해 있지 않아서 빛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빛운영 전 미흡한 밝기인 데서 형성된 무명한 습관을 반복할 뿐, 천지와 사람에 발현한 새로운 밝기의 빛을 갈무리해 자기 자신이 새로운 밝기가 되게 진전해 갈 줄 모른다는 것이다. 물들어 온 때 노 저어야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수께서는 네 안의 빛이 어둡지 않은지 보라고 하셨는데, 돌아본 빛이 의미 있게 밝은 빛이면 그 빛을 되먹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이처럼 빛을 성찰해보는 것을 통해 마음 본성의 순수가 깨어나고, 깨달음이 촉발하고, 영적 진화가 활발히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 안의 빛이 미약하면 빛이 빛 자신을 아는 빛의 자기 지각력도 약해서 그럴수록 그 사람은 빛에 대해 알기 어렵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을 고착화시키는 결과가 되는 자기 빛 되먹음이라면 이는 문제적 상황이다.

 

자기 빛을 되먹으며 미약한 밝기에 그쳐 있는 것은 다람쥐가 쳇바퀴 속에서 달리는 것과 같아 앞으로 나아간 것이 없게 된다. 대우주의 무한한 광명과 단절된 채 영적 진화가 일어나지 않는, 정체된 상태에 멈춰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미흡한 자기 밝기에서 초탈해 충분히 밝은 새로운 밝기, 무한히 밝은 빛으로 향해 나아가고자 희망한다면 한걸음 한걸음 그렇게 접근해 갈 수 있게 되는 경로가 존재한다. 필자가 말하는 빛운영이 이것이고, 빛운영해서 밝아진 빛을 갈무리해 자기 밝기로 만드는 빛의 자기화’(빛과 의식의 합일)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다음의 두 가지 조건이 성숙하면 빛의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첫째, 빛운영해 자기가 밝아지고, 천지와 사람이 밝아지도록 돕는다.(빛운영)

 

둘째, 순수의식의 주의를 진공에 기울여서 진공빛이 응답해 의식에 밝아지고 빛과 의식 사이의 간격이 사라지는 결과에 이르러 간다.(빛의 자기화/빛과 의식의 합일)

 

빛운영 활동을 수행해 자신이 밝아지며, 다른 사람과 세상도 함께 밝아지도록 돕는 것이고 밝음이 증대된 빛과 소통해 무한한 빛과 하나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무궁화> ⓒ 인곡본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