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 천지의 본음/1부 1장 28

동기화와 하늘에 쌓은 보물

동기화(同期化)는 전산기 용어에서 싱크로니제이션(synchronization)이라 하여 두 개 이상의 기기, 또는 웹 사이트가 같은 정보를 표시하도록 연결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통해 PC의 보관함과 스마트폰의 데이터를 일치시켜서 PC의 보관함에 데이터를 저장한 것을 스마트폰에서 열어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싱크로니제이션의 동기화는 인간의 기술이 진보함으로써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지만, 인류사에 등장한 이야기에서 동기화 원리를 엿볼 수 있다. 성경에는 ‘하늘에 쌓은 보물’(마6:19~21) 이야기가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

일어나 빛을 발함

​​​​ ​​​​​​​​​​​​​​​​​​​​​​​​사람 안에 빛이 들어있어도 빛이 잠들어 있는 동안은 빛의 활동에 의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때 빛은 없는 것과 같다. 이는 ‘하느님은 영이 산 자만을 살았다하시고 영이 죽은 거듭나야 하는 자는 하느님께는 없는 것과 같’게 되는 이유이고, 사람 안의 진공빛이 밖의 진공빛과 공명해 밝음이 소통하는 빛현상과 관계된다. 마음이 빛 아닌 것에 향해 간 동안은 하느님에서 유래해 사람 안에 있는 빛은 쉬기만 하고 거의 활동하지 않는 상태로 있게 된다. 이는 사람이 관찰자이지 않으니 관찰 효과가 일어나지 않는 바로 그 이치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하느님에서 와서 사람 안에 있는 빛이 미약한 때문에 일어난다. 성경의 창세 이야기에 따르면 아담의 타락으로 사람 안에..

화엄 행동

​ 분광학은 별빛을 파장별로 분산시켜 죽 깔아놓고 (스펙트럼) 파장대별로 나누어서 분석하는 분야이다. 이 방법을 가지고 다른 행성에서 나오는 빛을 관측하면 그 행성의 대기조성이나 물질조성을 알 수 있다. 천문학자 허블은 분광기를 이용하여 우주가 팽창하는 사실을 증명했다. 빛이 이렇게 파장대별로 나누어지는 분광은 전자기파에서 생기는 현상이다. 즉, 밤하늘을 광학망원경으로 본다는 건 가시광선을 보는 것이고, 전파망원경은 확대된 가시광선, 즉 전자기파를 보는 것이다. 전파나 가시광선이나 어차피 전자기파로서의 빛일 뿐이고 양자역학적으로는 빛 알갱이인 광자(photon)일 뿐이다. 이러한 빛을 프리즘 등의 광학기구를 이용해 스펙트럼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음이 활동하는 것은 하나인 마음이 여러 상태로 쪼개지는 것이..

공이 개벽한 시대의 거울갈기

중국 형산에 ‘마경대(磨鏡臺)’란 글을 새겨 세워둔 비석이 있다. 글자의 뜻은 '거울을 갈았다'는 뜻이지만 마조가 마음을 깨달아 도를 이룬 것을 기념하는 비(碑)이다. 이와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마조(馬祖, 709~788)가 좌선하는데, 마조의 스승 회양선사가 좌선하는 마조 앞에 와서 기왓장을 숫돌에 갈았다. 마조가 이상해서 무엇하시냐고 물었다. “무엇하세요?”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아니, 스님. 기왓장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 “그럼, 앉아 있으면 부처가 되고?”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 수 없듯 앉아서 좌선한다고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일깨움을 주고자 한 것이었다. 이에 마조가 느낀 것이 있어 여쭈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소가 수레를 끌고 가다 수레가 멈추면 수레를 때려야 하..

없지만 있는 수 ‘0’

명수법(命數法)의 기초는 0에서 시작하여 9로 끝나는 열 가지 숫자다. 만일 여기서 0이 빠진다면 인간이 소중히 여기는 개념들이 허물어진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라. 2020과 22의 차이는 크다. 숫자 0이 존재하기 위한 철학적 기초가 우리들의 머릿속에도 있고 가슴속에도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이되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막힌 변증법적인 개념에 익숙하다. 산스크리트어 ‘슈냐 shunya’는 ‘공’이면서 ‘부재’를 뜻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나 ‘공즉시색(空卽是色)’ 이라는 말은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친숙하다. 우리는 0을 발견하기 위해서 ‘空(공)’이란 개념을 수용한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선가 이런 말도 ..

공사상과 빛운영

초기불교의 공은 번뇌가 ‘비어 있다’거나 어떤 것 혹은 어떤 상태의 ‘부재(不在)’를 의미했다. 붓다 ; 사리불이여, 그대의 모습은 고요하며, 표정은 맑고 빛이 난다. 그대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사리불 ; 스승이시여, 저는 지금 (마음이) 비어 있는 상태 (空, śūnyatā)입니다. 붓다 ; 참으로 좋다, 사리불이여, 그것이 바로 성자의 경지로서 空(공)이라 한다. (Majjima Nikaya) 이 말은 ‘마음에 번뇌나 망상이 없는 상태가 공(空)’이라는 뜻이고, 특히 '심공(心空)'에 대해 말한 것이다. 불교가 말한 ‘심공(心空)’은 우리가 ‘빛운영’과 연계해 ‘빛의 자기화를 위한 명상’을 하면서 순수의식의 주의를 진공에 기울인 상황 - 그리하여 진공빛이 응답해 순수의식에 밝아진 상태 - 와 유사할..

하늘과 통한 빛, 이마에서 나가는 빛

불교가 발생한 이후 약 500년간 인도에서는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이미 열반에 들어 존재하는 자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불상은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불상이 표현한 모습은 부처라는 존재의 철학적 의미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조형물이라 할 수 있는데, 깨달은 자(Buddha)인 부처는 인간과 다른 32가지의 모습, 80가지의 특징을 가졌다고 이야기되었지만 불상을 만들 때 이것들 모두가 다 적용되지는 않았다.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것은 머리에 높이 솟은 육계(肉髻), 이마의 백호(白毫), 둥글게 말린 머리카락인 나발(螺髮), 금색으로 빛나는 신체 등이다. 이 조형들은 모두 부처가 불성 정광명(진공빛)이 석가라는 인생을 옷 입어 응신해 오신 빛의 존재..

뇌에 내려온 빛

진공은 신이 만든 피조물이 아니라 스스로 비어 있는 자존자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진공, 곧 ‘모습 없는 하늘’(진공)은 ‘하늘들의 하늘’이고 ‘하느님’이 존재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진공빛은 사물이 발한 빛으로 대체될 수 없고, 신앙이라는 마음 활동이 일으킨 정신 성분의 빛과도 동일시되지 말아야 한다. 진공빛은 인생이 마음 활동을 그치고 진공을 바라보는 동안에 그가 거기 존재한 것을 본다. 빛은 빛을 알고, 빛 아닌 것은 알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은 주체와 객체, 존재와 비존재, 선과 악, 상승과 하강, 완전과 불완전, 속박과 자유의 차별에 관한 탐사 활동을 하고 그것들에 반응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이에 따르는 문제를 극복하고자 척추를 곧추세우고 호흡을 조절하는 훈련도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런 명..

선인장과 신선

​ 백년초는 Cactus / 仙人掌(선인장)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왜 ‘신선의 손바닥’(仙人掌)인가? 선인장의 두드러진 특징은 가시가 많다는 것이다. 손바닥처럼 넓적한 선인장에 바늘같은 가시가 숭숭 돋아나 있다. 그런데 신선의 손바닥이다. 인류사 최초의 신선은 누구냐 하고 생각하고 보니 구약 성서에 나오는 인류의 시조인 남자《히브리 어로 ‘사람’의 뜻》, 아담(Adam)이 떠오른다. 그는 하느님의 동산에 산 사람이다. 神仙(신선)이라는 글자는 神 + 亻 + 山 으로 파자된다. 산(山)에 사는 신령(神)한 사람(亻)이라는 뜻이다. 또 佺(전)이라는 글자는 ‘신선의 이름’이라는 글자인데, 亻 + 全으로 파자되고, 완전한(全) 사람(亻)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아담은 하느님이 살린 생령(神)인 ‘사람’(亻)..

불화의 빛

불교에는 수많은 불보살이 등장하였는데, 모두 비로자나불을 진신(眞身)으로 하여 설법을 위해 응신(應身)한 형식이다. 비로자나는 청정법신(淸靜法身)이라 하여 형상이 없이 계시고 일체중생을 감싸 보호하시는 부처이다. 사찰에서는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은 불상이 없이 비워 두는데, 이는 비로자나는 진공을 불격화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비로자나를 모신 법당을 대적광전(大寂光殿)이라 부르는데, ‘대적광’은 ‘크게 고요한 광명’으로, 진공의 세계가 큰 고요의 세계이자 진공빛의 세계인 것을 말한 것이다. 진공 세계의 큰 고요를 ‘부처가 설법하는 말소리가 없다’하여 ‘무설(無說)’이라고도 부른다. 불국사에 법을 설하는 강당 이름이 무설전(無說殿)인 것도 그런 뜻이다. 비로자나의 산스크리트어는 바이로차나(vairoca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