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을 본 사람은 자신이 지금까지 동굴 안에서 본 것은 그림자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이데아’의 환한 빛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서 그 사람은 동굴 속으로 되돌아가서 바깥의 태양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린다. 이 사람의 이러한 선택은 동굴 비유를 빛나게 하고 철학의 존재 이유를 밝힌다. 어둠은 빛 속으로 나아가서 소멸하지만, 빛은 어둠에 다가서고 어둠의 안으로 들어서는 선택과 행동을 하여서 어둠을 이기니 말이다.
선사시대의 철인들은 모습이 없는 하늘·하느님의 광명이 인간 세상을 비추고 빛이 사람을 옷 입어 와 인생에서 빛의 일을 한다는 – 하여야 한다는 - 사상을 가졌다.
(모습 없는 하늘·하느님의) 신이 내려와 : 一神降衷(일신강충)
사람의 성품은 (모습 없는 하늘·하느님의) 광명에 통해 있으니 : 性通光明(성통광명)
(빛이 깨어) 천지와 사람을 두루 비추어 : 在世理化(재세이화)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라 : 弘益人間(홍익인간)
환웅께서 홍익인간의 이념을 가르쳐 말씀하신 것이다.
동굴 비유에서 동굴로 되돌아가 자기가 밖에서 본 것에 대해 알리는 것은, 곧 모습 없는 하늘·하느님의 빛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이 동굴로 되돌아가기로 선택하고 행동한 것은 빛나고 아름답다. 그는 홍익인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한 행동은 더 확장될 필요가 있다. 빛에 관한 뉴스를 전하는 것에서 진일보해 동굴 안에 햇볕이 들게 빛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곧 동굴 비유의 동굴 속은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무명이 폭넓고 깊으며, 빛에 관해 말한 경전이 전해지고 있어서 눈 밝은 이가 읽지만, 빛에 관한 이야기가 실질적인 빛인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비유’는 실재, 곧 ‘이데아’로 전환되어야 한다. 천지와 사람이 정말로 밝아져야 하며, 밝아진 빛을 갈무리해 사람 안의 속사람, 참자아인 순수의식이 빛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생각해본다. 만일 플라톤이 자신이 한 철학에서 비유의 빛을 말한 것에서 더 나아가 실재 빛이 응답해 천지와 사람에 밝아지도록 빛운영할 수 있었더라면, 세상은 벌써부터 빛세상이었으리라.
세상, 곧 동굴 비유의 동굴 속은, 동굴 입구의 아득한 위쪽에 불이 타고 있어 그 불이 사람들의 뒤에서 비추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앞쪽의 벽에 그림자가 생긴 곳이다. 사람은 정지되어 있고 그림자가 활동한다. 또 동굴 속은 동굴 밖에 태양이 있다는 뉴스를 전하는 활동이 혼재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나의 철학과 선택과 행동은 어디에 속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우리에서 자아로 등판한 것이 ‘영’인지 ‘혼’인지 돌아보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비유적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색색(色色)
색공(色空)
공색(空色)
공공(空空)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그림자를 실재라고 착각하는 것은 곧 오온(五蘊)을 실상으로 여긴 전도몽상(顚倒夢想)의 상태이고, 이는 ‘색색’의 상황이다.
동굴 밖에 나가 태양을 보고서 동굴로 되돌아와 사람들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권하는 사람은 곧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알아 모든 고액을 넘어선 자, 관(觀)이 자재(自在)한 이이다. 이러한 존재는 ‘공공’의 상태라 할 수 있다.
‘공공’인 존재는 수십 수백 세기에 한두 명 와서 빛의 일을 하신 신인(神人), 성자들이다. 환인, 환웅, 단군 삼성이 그런 분들이고, 부처의 응신과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그러하시다.
사람 대다수는 ‘색색’의 상태이지만 일부 ‘공색’인 사람과 ‘색공’인 사람이 있다.
‘공색’인 사람은 자아로 등판한 것이 ‘공’이면서 – 마음의 본성이 깨어서 의식이 청정한 사람이면서 – ‘색’을 상대해 ‘공’에 대해 일깨우는 중이다. 플라톤도 이런 사람이리라.
‘색공’인 사람은 자아로 등판한 것이 ‘색’이고 – 즉, 인생의 마음이 자아로 활동하는 중이면서 - ‘공’에 대해 논하는 중이다. 경전이 빛에 대해 말한 것을 해석해 사람들과 나누는 중이지만, 인생의 마음이 신앙 활동한 정신 성분의 빛과 혼동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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