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 천지의 본음/1부 1장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과 빛운영

능 소 2022. 8. 15. 11:31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기독교 천년 제국의 기틀을 세운 신학자이자 성직자(주교), 그의 신학의 골자인 조명설은 플로티노스의 빛 철학을 통해 선사시대의 광명사상으로부터 영감받은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처음에 인간은 이성으로 진리를 찾아 나선다. ​​우리는 세상을 이룬 감각적인 사물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사물은 변하고 지나가서 결국 없어지므로 우리는 그것들에서 진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이번에는 우리 자신의 안으로 들어와 진리를 찾게 된다.

 

우리의 안 , 의식 속 - 에는 감각적인 사물들의 인상(印象, imago)들과 형상(形相, forma - 본질)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쉽게 변해 없어지는 감각적 사물보다는 오래 견디고 보다 지속적이다. 하지만 의식 속에 있는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서 지나가버리고 결국에는 없어지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에 있는 것에서도 진리자체인 것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우리는 마지막으로 우리 자신의 의식에 있는 것에서도 뛰어넘게’(超越) 된다. 이때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진리자체으로 우리를 비추어 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조명’(照明, illuminatio)이라 하였다. ​​진리자체인 빛이 우리를 비추므로 마침내 우리는 진리자체볼 수 있게 된다. ‘을 보는 것이다.

 

진리자체으로 우리를 비추어서 우리가 을 보게 된다는 점에서 이 조명네 안의 빛이 어둡지 않은지 보라’(누가복음)한 예수의 권고에 다가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두루 모든 것을 비추는비로자나의 광명변조(光明遍照)가 일어난 것이고, 공적영지(空寂靈知)의 광명이 활동한 것이라고 알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은 우리가 빛을 자기화하기 위해 순수의식의 주의를 진공에 기울이는 명상을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 순수의식을 수립하는 것은 세상에 분산되었던 마음을 마음의 본래 자리로 불러들인 것이고, 우리 안에 들어서 있는 감각적인 사물들의 인상들과 형상들을 비우는 것이다. 이어 우리가 순수의식의 주의를 진공에 기울이면 이것은 이제 우리 자신마저도 뛰어넘는 그것이고, 이렇게 우리가 순수의식으로 진공을 바라보면, 이 관찰에 응답해 진공빛이 의식에 밝아진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조명이 말하고자 한 것이리라.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조명이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알아야 한다. 세상과 인생들은 신의 광명을 잃은 상황이므로 - 성서의 표현을 빌면 '아담의 타락' 이후는 신의 빛이 상실된 세상이기에 - 세상에 나타나 있는 빛이나 우리 안의 빛은 미약한 수준이다.

 

​​​천지가 띤 광명이 희박해 우리 안의 빛도 미약하고, 빛에 공명해 일어나는 빛의 공진도 크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빛이 발현해 행동하는 것이 보여주는 규칙이고, 이 규칙은 엄정하여서 '진리'조차도 이에서 멀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조명은 자신만이 어렴풋하게 아는 수준으로가 아니라 빛 자신의 본래 크기로 위대하게 일어나야 한다. ‘빛의 자기화도 자기 안의 밝기를 되먹임하는 정도이지 말고 광명의 본래 크기와 합하는, 거룩한 크기로 일어나야만 한다. 진정한 '성통광명'이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과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빛을 상실했으니, 진공빛이 천지와 사람에 밝아지도록 유도하는 빛운영을 해야만 한다. 빛운영은 불가피한 활동이다. 진공빛이 밝아지는 변화는 오직 빛운영할 때 일어나므로, 빛운영을 배제하고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어렴풋한 기존의 밝기에 의지한다면, 우리가 어떤 목소리로 '진리'를 들먹여도 결국은 이론에 불과하게 된다. ​​겨자씨가 자라 큰 나무가 되어야 하고, 미약한 빛은 창대해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조명'이 하느님 빛의 본래 크기로 장엄하게 일어날 수 있게 된다.

 

 
 

()을 아는 것과 빛운영을 하는 것

 

 

 

인류사에서 빛은 성스러운 모든 것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의 경전들은 최초의 빛에 관해 이야기하였고, 예수 탄생 이후 하느님이 어떤 종류의 빛인가를 두고 기독교적인 논쟁이 붙기도 했다. 초창기 기독교 문헌에별빛이 그 너머의 참빛의 파편을 전달한다고 한 말이 있는 것도 그 논쟁의 한쪽이 한 말이다. 그리고 피조물들의 배후에 조물주 하느님 차원의 빛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성경의 창조신화에서 빛은 특권적인 지위이다. 창조에 앞서 먼저 빛이 있게 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 신의 빛은 만물에 앞선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아야만 한다.

일어나 빛을 비추라(60:1-6, 3:1-9, 2:1-6..)지만 신의 빛을 영접해 협업하라 한 것이지 사람이 신앙 활동한 정신 성분의 빛으로 대신하라는 것은 아니다. 해달별이나 조명기술이 발생시킨 물질 성분의 빛을 말한 것이 아니듯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적인 빛의 조명을 통해 영원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조명설을 주창하였고, 그의 조명설은 기독교에 유입되어서 참빛을 설명하는 지혜 체계를 제공했다. 12세기 말 이슬람의 스라와르디도 신이란 순수한 빛이 인간의 영혼 속에 빛나는 것이라는 조명철학을 펼친 바 있다. 빛의 철학자로 불린 플로티누스의 유출설도 같은 뜻의 말이라고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빛이 진리와 인생을 비춘다는 철학은 모두 선사시대 철인들의 성통광명 사상과 회통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에서 보자면, 진리의 인식은 내적 경험, 즉 이성적 인식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을 통해서도 인식을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인식은 동물의 것과 다르지 않고 신의 선물인 이성적 인식을 통해 사물의 본질과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은 빛에서 일어난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런 주장은 동물들은 진공빛이 희박해 없다시피하고 사람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밝은 것과 관계되는 것이기도 하다.

 

스라와르디가 신이란 순수한 빛이 인간의 영혼 속에 빛나는 것이라 한 것이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선물인 지성적 빛이 사람 안에 내재했다고 한 것은 불교의 선사들이 사람 안에 자기영광(自己靈光)인 투명한 빛이 있음을 성찰한 것과 다르지 않다. 진공빛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창조자인 신의 의향에 따라, 신의 선물인 지성적인 빛에 의거해 자연의 질서와 진리를 인식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것은 마치 태양과 같이 신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 조명하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신은 우리를 가르치는 내심(內心)의 교사가 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신의 선물인 빛이 인간에서 어떻게 작동하여 내심의 교사가 되는가?

 

이에 대하여는 사람에 밝은 진공빛이 그 사람의 정신 활동을 비추어서 진동수적인 상승을 불러일으키는 것, 곧 빛의 영성이 번쩍여서 영감이 일어나는 것과 관계된다고 알 수 있다. 이것은 빛이 빛 자신을 아는 성자신해(性自神解)가 촉발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충분히 밝은 사람이라야 사물의 본질과 세계의 전모에 대해 깨달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사람 안의 진공빛과 우주의 진공빛이 공명해 빛이 주는 은사와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사정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에 주목한 어느 교육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내심의 교사인 이성에 의해 진리를 인식하고 신의 의지와 목표에 대해 통찰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공감되는 말이다. 그러나 빛에 대해 아는 것을 넘어 빛이 밝아지는 궁극의 변화에 이르러야 한다. 조명설을 공부하고 조명철학을 통달해도 그리고 어느 종교를 하고 어떤 수행을 해 경지를 열어도 그 때문에 사람 안의 진공빛이 밝아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돌아보아야 한다.

 

하느님은 진공이시다는 앎에서 신의 빛은 진공빛이고, 이 빛은 빛운영에 응답한다. 누가 빛운영자로 활동하든 빛운영을 수행한 만큼 진공빛이 천지와 사람에 밝아진다.

 

 

 

 

백순임 명상화

 

'제 3권 : 천지의 본음 > 1부 1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명심학의 치양지  (0) 2022.08.15
선시(禪詩)의 신광(神光)과 빛운영  (0) 2022.08.15
성경이 말한 빛들과 빛운영  (0) 2022.08.15
이데아와 빛운영 2  (0) 2022.08.15
이데아와 빛운영 1  (0) 2022.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