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 천지의 본음/1부 1장

성경이 말한 빛들과 빛운영

능 소 2022. 8. 15. 11:21

 

 

 

성경의 첫 장에서 빛이 언급된다. 빛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모든 이야기에 앞서 말해진다. 사실은 그 이상이다. 빛은 처음 시작과 새로운 시작을 연다. 새로운 것이 다 빛에서 나온다.

 

''이라 하여 같이 이름 부르지만, 조물주의 빛과 피조물의 빛이 다름을 새겨 알아야 한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이 빛은 조물주 자신의 빛이다. 이 빛이 있고서 하느님이 첫 창조를 하셨다. 다시 하시는 새 창조도 이 빛으로 하신다.

 

하느님은 진공이시다는 앎이 명료하면 피조물의 빛과 혼동하지 않게 된다.

 

창조의 넷째 날 태양이 낮을 밝힌 것과 여섯째 날 사람이 있게 되어서 사람의 생체가 띤 빛과 마음 활동이 내는 빛이 있기 전에서 천지창조에 앞서 하느님의 빛이 있었다. 이 빛은 성분이 진공이다.

 

진공이신 하느님은 모습 없이 계셔서 인생들이 감각으로 볼 수 없고, 정신 활동하여 교감하지 못한다. 인생들이 혼란을 겪고, 해석에서 오해하게 되는 지점이다.

 

성분이 진공인 빛은 그 존재가 감춰져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이 이 빛에서 나왔고, 만물이 이 빛 가운데 있으며, 사람의 안에도 이 빛이 들어서 있다.

 

하느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God divided the light from the darkness.

 

진공요동에서는 입자와 반입자의 생성 소멸이 연속되고 이것들이 쌍소멸하는 때 빛이 나타난다. 빛이 진행하다가 빛이 사라지고 입자와 반입자로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일이 아직 우주와 사물이 출현하기 전에 진공에서 있었다.

 

하느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God called the light Day

 

하느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신 것은 창조의 넷째 날에 해달별이 있게 된 것이다. 해와 달의 빛과 열이 지구상에 생태계를 성립시킨다. 여섯째 날에 사람이 창조된다.

 

사람은 해달별에서 입자와 파동, 이것들이 상호작용하는 질서를 얻어 생체가 성립한 존재다. 하느님이 먼지로 사람을 빚은 것이다. 그렇게 한 다음 하느님의 빛이 사람의 안에 들어서 섰다.

 

하느님의 빛은 영생하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서 빛은 사람의 영생하는 생명이 되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야고보서 1:17

 

빛들의 아버지에서 내려오는 은사는 태초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 하느님 빛의 거룩함과 충만한 기쁨을 공유하는 것은 선물을 받는 것이다. 사람의 생체를 위한 일용할 양식은 해달별이 회전하는 것에서 얻어진다.

 

사람이 생체 활동하는 것에서 생기는 정신 성분 빛도 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 창세기 4:6

 

안색은 얼굴빛이고, 이는 마음 활동에서 생긴 것이다. 이 빛은 오늘날에 신앙 활동에서 부추겨지면서 이 빛과 하느님의 빛이 혼동되기도 한다.

 

실로 웅장하십니다.

영화도 찬란히 화사하게 입으시고

두루마기처럼 빛을 휘감았습니다.

당신은 더없이 위대하십니다.

권위와 위엄을 갖추셨습니다.

빛을 옷처럼 걸치셨습니다.

(시편 104:1~2)

 

시편의 이 시는 사람 모습의 신을 예찬하는 것 같다. '하느님은 진공이시다는 앎에서 진공은 진공요동하여 빛현상을 수반한다. 진공의 빛 자체는 투명하게 비어 있는 모습이지만 진공이신 하느님은 천지인을 열어 온갖 빛들을 옷처럼 걸친 모습으로 존재하신다. 이 시의 저자는 자신의 신앙심이 가진 정신 성분 빛을 사용하여 찬란하고 화사한 빛깔이 있는 신을 경험하는 중이다. 하지만 성경의 표현에도 하느님은 모습이 없음을 드러내 주는 문장들이 존재해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경의 다른 말들 사이에 떨어져 있었던 부분들을 가져와 한 문장처럼 놓아준 다음 말씀도 하느님은 진공이시다라는 의미를 함축해 가진 문장이다.

 

아버지는 가까이할 수 없는 빛 속에 사시고’, ‘하느님은 영이시며’,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 진공빛을 직시하는 것이 하느님께 나아감이요, 진공빛이 밝아지는 것이 빛과 하나됨이요, 진공빛이 천지와 사람에 비추게 협업하는 것이 의인의 일인 것이다.

 

아담의 타락은 하느님의 빛과 하나였던 사람이 하느님의 빛을 잃어 먼지로 돌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느님의 모습 없는 빛으로 돌이켜 회복하는 것이고, 빛의 회복은 하느님의 빛이 다시 비추어서 오게 된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곧 하느님의 빛이 인간 세상을 비춘 것이다. 하느님의 빛은 머리로 내려와 얼굴에 밝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빛이라 하였다. (고후4:6). 바울은 예수의 모습에서 광명한 진공빛을 보았을 것이다.

 

새 창조, 곧 그리스도의 재림도 하느님의 빛이 비추는 것으로 온다.

 

하느님의 빛이 다시 비추는 것을 영접해 하느님의 빛이 천지에 비추도록 협업하는 활동을 하는 이들이 있게 된다. 그들의 수는 상징이며, 그 수가 십사만사천이다.

 

이들은 하느님의 빛이 거룩한 것에 참여해 같이 거룩해지고,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일을 협업하는 활동을 하고 나선 사람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의인이 된 사람들이고, 현명하여 하느님의 빛을 아는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물을 볼 때는 혼육의 감각을 사용하고 빛과 협업할 때는 영, 곧 순수의식으로 깨어 빛의 눈을 뜬다. 이들은 하느님이 새 창조를 하는 것에 함께하고, 천지와 사람에 밝아진 하느님의 빛 가운데서 살아간다.

 

 

토라( תּוֹרָה, Torah)는 하느님의 빛이 가진 세 가지 특징으로 펼치는 것, 주는 것, 나누는 것을 꼽아 설교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진공빛의 특징을 말한 것이다.

 

펼치는 특징

שָׁלַח 샬라흐 : To spread. 보내다, 펼치다, 전파하다.

 

빛이 있으라하여 하늘을 펴시고, 창조의 두루마리를 펼치신 것도 샬라흐이다.

 

주는 특징

נָתָן 나탄 : To give. 주다.

 

빛 자신을 주는 것이다. 빛은 사물을 비추어 빛 자신의 생명을 전한다. 주고 또 준다. 주었다는 기억도 저장해 들이지 않는다. 진공은 안을 비워 밖으로 내보낸다.

 

나누는 특징

חָלָק 할라크 : To share. 분깃. 공유하다.

 

주는 것은 공유하는 것이다. 약속의 땅도 분배해서 공유한다. 하느님도 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소유가 아니라 모두의 하느님이다. 진공 안에 우주가 있고 만물의 안에도 진공이 있다. 진공은 공유된다.

 

진공은 공간을 미는 힘, 척력(斥力)으로 작용하여 이 우주를 펼친다. 천지를 연 창조도 펼친 것이다. 우주에 존재한 물체들은 서로 당기는 힘, 인력(引力)으로 작용한다. 이 두 힘이 균형을 이룬 조화 자리에 이 우주와 사물이 놓여져 있다.

 

사람의 안에 하느님에서 온 빛이 있어 이 빛으로부터 척력 성향이 나온다. 이 빛의 작용이 강할수록 빛의 특징인 펼치고, 주고, 함께하는 성향이 강해진다. 반면, 인력의 성향의 작용으로 에너지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겨서 거두고, 가지고, 저장하는 행동을 한다. 빛의 성향이 약하고 물질에서 온 인력 성향이 커지면 지난친 욕심이 된다.

 

펼치고 나누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행동은 빛에서 나온다. 펼치고, 나누고도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 기억해 간직하는 것은 인력 성향이지 척력 성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한 것은 진공 빛의 척력 행동을 하라고 한 것이다.

 

 

유대에는 모습이 드러나 있지 않은 차원에 대한 빛 사상이 있다. 카발라 사상에서는 이 빛의 차원을 음존재라고 하였다. 이 빛사상은 저 선사시대 선도의 세계관이 모습 있는 하늘은 현현한 세계이고 모습 없는 하늘은 현현하지 않은 세계라고 한 것을 말한 것이다. 모습이 드러나 있지 않은 차원에 대한 빛은 곧 진공이다.

 

카발라가 음존재의 세 베일이라 하여 말한 것은, 필자가 보기에는, 진공이라는 하나의 본체가 진공, 진공요동, 진공빛이라는 세 작용으로 존재하여 창조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아인 (000 אין-공허) : 진공

아인 소프 (00 אין סוף-무한) : 진공요동

아인 소프 오르 (0 אין סוף אוֹר-무한광) : 진공빛

 

카발라에서는 아인에서 아인 소프가 나왔고, 아인 소프에서 아인 소프 오르가 나왔다고 한다. 진공이 있어 요동치고 빛이 있는 것이다.

 

요동친 진공에서 빛이 사람 안에 내려왔다. 사람 안의 빛은 하늘의 빛에 상응한 것이다. 사람 안에 들어선 하느님의 빛은 영생하는 생명의 활동이다. 그래서 카발라에서는 사람 안의 빛 체계를 생명나무, 세피로트의 나무라 불렀다.

 

세피로트의 나무는 신시(神市)의 신단수(神檀樹)를 말한 것이다. 빛은 진리이자 영생하는 생명이고 빛의 길은 저 선사시대에는 모두가 다닌 길이었다.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민족과 유대민족은 한집안이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모습 없는 하늘인 진공에서 해달별의 우주 자연계인 모습 있는 하늘이 나왔고, 사람은 두 하늘 모두에 상응한 존재인 것이다. 생체인 혼육은 해달별 우주 자연인 모습 있는 하늘과 에 상응하고, 이에서 일용할 양식을 얻는다. 사람 안의 내면 자아인 빛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חָלָק 할라크 : 공유한 것이다.

 

 

'신단수'가 그려진 고구려 고분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