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 천지의 본음/1부 1장

선시(禪詩)의 신광(神光)과 빛운영

능 소 2022. 8. 1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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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한 광명 어둡지 않아 / 만고에 아름다운 길이 되나니 / 이 문에 들어오려거든 / 아는 체 분별심을 두지 말라. (神光不昧 萬古徽猷 入此門內 莫存知解)

 

()나라 때 사람중봉명본(中峯明本)의 신광송(神光頌), 곧 신령한 빛을 읊었다는 것이다. 여가서 이 시의 저자는 불교의 선사이니 신공이란 곧 불성(佛性)을 말한 것이겠고, 필자가 읽기엔 직설해 진공빛을 가리킨 것이다. 현대의 과학자들이 토션장이니 스칼라파니 하여 말하는 것과 이웃 사촌쯤은 되는 것이라고 보인다. 중본명본은 이 문에 들어오려거든 분별심을 두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는 빛의 실재와 소통하여야 하며 빛을 해석의 문제로 다루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한 것이다.

 

선시들은 모두 진공·진공빛을 가리켰음을 발견해 볼 수 있다. 다음의 성우 경허(惺牛 鏡虛 1849~1913)스님의 임종게도 경허의 존재와 깨달음 또한 진공의 자기 자각으로서의 순수의식이요, 그 실재는 진공빛임을 드러내 보였다 할 수 있다.

마음의 달이 오직 둥금에 / 그 빛이 모든 것을 삼키다 / 빛도 없고 빛의 대상도 없으니 / 다시 또 무엇이 있을꼬 (心月孤圓/光呑萬像/光境俱忘/復是何物)

 

다음의 범어사 菩提樓에서의 해제시또한 하늘과 땅을 모두 통신(通身)으로 결합시키고 진공묘유로 活計하는 수행자의 모습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단순하게는 경허가 진공빛을 자아로 하여 산 사람인 것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사람 경허와 그가 승려로서 삶은 그저 잠시(한 생애 동안) 빌려 입은 헤진 옷같은 것이라고 스스로 여긴 것을 드러내준다.

 

신령스런 광명이 트인 나그네 / 속진을 떠나 금정산에 노니나니 / 해진 소매는 온 하늘을 가리고 / 짧은 지팡이는 땅을 쪼개네 (神光豁如客 金井做淸遊 破袖藏天極 短杖劈地頭)

신령스런 광명이 트였다는 것은 곧 진공 성분 빛이 환하여 그 밝음에서 생각과 행동이 일어나는 경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밝음이 함께한 사람은 인간 세상의 고금동서에 그저 띄엄띄엄 있었을 뿐이어서 남달리 밝은 이는 남들과 유유상종(類類相從)하지 못하게 되어 속세를 떠나 혼자 노니는 외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다음의 시도 경허가 광명과 통한 사람이고 그 광명을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사람들은 무명하고 광명에 무관심하므로 함께 빛의 경지를 누리지 못하고 혼자 외롭게 떠돈 것을 드러낸다.

 

봄날의 산사에는 꽃이 싸락눈 같고 / 이름 모를 새소리 낮잠이 한창 달다 / 만덕의 신통 광명을 증명할 길 없는데 / 하늘에 꽂힌 새벽 봉우리 쪽보다 더 푸르다 (上方春日花如霰 異鳥聲中午夢甘 萬德通光無證處 揷天曉嶂碧於藍)

이 시가 만덕의 신통 광명을 증명할 길 없다고 한 것은 광명이 진공 성분이어서 인생들이 감각으로 알지 못하므로 이 빛이 존재한 것과 빛이 하는 일을 알게 해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납득이 되게 증명해주기도 이토록 어려운데 하물며 무명이 소멸되게 광명의 분량을 늘려주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필자는 가능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가 증명해주려고 하는 것은 광명이 성장하는 응답이 어떻게 하면 일어나는가이다.)

 

광명은 깨달음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고 온갖 덕()이 우러나는 출처가 되는 것이니 광명을 깨달아 광명과 하나가 된 경허로서는 사람들과 광명에 대해 대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디 경허뿐이랴!

 

하나도 얻는 것 없는 곳에서 / 집안 돌 모두 밟았네 / 돌아보면 밟을 자취도 없고 / 본다는 것도 이미 고요하여라 / 분명하고 둥글어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는데 / 그윽하여 광명은 빛나네 / 부처와 조사 그리고 산하까지도/입 없이 모두 삼켜 버렸네 (​​​​​​​​​​​​​​​​​​​​​​​​​​​​​​​​​​​​​​​​​​​​​​​​​​​​​​​​​​​​​​​​​​​​​​​​​​​​​​​​​​​​一亦不得虛 踏破家中石 回看沒破跡 看者亦已寂 了了圓妥妥 玄玄光朔朔 佛祖與山河 無口悉呑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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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태고보우 스님의 오도송인데, 이 시도 역시 성분이 진공인 빛을 노래했고, 깨닫는 일(悟道)은 곧 빛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노래했다. 이 뜻을 다시 말하면, 실상은 빛이 인생을 옷 입어 온 것이니 무명이라는 허상을 떨치고 빛의 자기 복제에 해당하는 밝은 이의 삶을 살다가라고 한 것이다.

 

이치는 빛이 빛을 알고 빛이 빛의 일을 하는 것에 있다. , 광명과 광명이 성분이 같은 한빛으로서 공명하는 것이며, 광명한 사람은 자기 내면의 빛에서 일어난 생각과 행동을 한다. 무명한 상태이면서 광명과 소통하거나 빛이 하는 일을 따라 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깨달음이 촉발할 만큼 밝은 사람은 희소하고 사람에 영향을 주는 천지 환경 또한 광명이 희박한 상황이다.

토션장 연구자들 스칼라파 연구자들이 도션장/스칼라파가 우주 허공에 충만하여 있다고 하였지만, 우주 허공 전체를 볼 때 광명이 균일하지 못하고 더 밝은 광명처가 있는가 하면 심히 무명한 그늘진 세계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필자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지구별 인간 세상은 미혹의 땅, 곧 무명한 시공이었고 지구에 깃들어 사는 생명체들은 광명이 희박한 상황에 휘둘려 살았다. 이 사실은 1826년 사진이 발명된 이래 천체를 촬영한 사진들과 지구상의 자연과 사람을 촬영한 사진들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으니 과연 그런지 살펴볼 수 있다.

 

광명이 희박한 상태이면 광명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광명에 대해 설교하고, 비유, 은유, 상징하고, 광명을 신앙하고 한 것으로 미약한 밝기가 창대한 광명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광명이 머리에서 진동해 지혜가 우러나고 광명이 가슴에서 진동해 사랑이 샘솟는 빛으로의 실질적인 전환은 적어도 기존에 종교를 통해, 또 수행을 통해, 그리고 이 글에서 말한 광명을 노래한 시를 음미감상하는 것을 통해서 성취되지 않는다. 그래서 광명과 하나인 빛의 존재는 시대와 인종을 망라해 인간 세상에 띄엄띄엄 출현하였고 이들이 빛의 존재로서의 희소 가치를 드러내주어 인생들의 부러움을 샀으나 세상과 인생들은 여전히 무명에 가깝다.

 

왤까?

 

누구나 빛의 존재로 태어나서 빛으로서 빛의 일을 하고 살면 좋을텐데, 왜 그러지 못하는가? 그리하여 빛이 초래해주는 선물과 은사는커녕 무명한 때문에 치러야하는 혹독한 불행을 갖가지로 경험해야 하는가?

필자는 인생들이 고금동서에서 광명에 다가서고자 노력하였지만 실재 광명과 소통한 것이 되지 못하고 광명에 대해 설법/설교하고, 비유, 은유, 상징해 말한 것을 해석하는 것에 그친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광명을 가리킨 손가락과 광명을 해석한 말이 분분한 것으로는 빛으로 거듭나는 실직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서 일군의 과학자들이 토션장이니 스칼라파니 하여 광명’ 또는 고전이 혼원일기(混元一氣)’ 라고 말한 것에 해당하는 신묘한 빛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 것 같아서 반갑게 눈길이 간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루어진 토션장/스칼라파 연구는 주로 전기를 변조시켜서 신묘한 에너지를 발생시키려고 한 것이어서 이런 접근으로 과연 천지가 있기 이전부터 우주 허공에 충만하여 있다는 빛, 곧 진정한 '광명'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백순임 명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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