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 천지의 본음/1부 1장

양명심학의 치양지

능 소 2022. 8. 15. 14:15

 

 

 

왕수인(王守仁)이 살았던 중국 명나라 때는 학자들이 대부분 주자학을 공부했다. 주자는 중국 송나라 때 학자로 공자의 가르침을 훌륭하게 정리하고 해석해 중국 사람들은 물론이고 조선의 많은 선비들도 그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따랐다. 주자는 공부의 시작이랄까 바탕이랄까 하는 것으로 격물치지라는 말을 썼다.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사물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여(격물) 지식을 넓힌다(치지)는 것.

 

격물과 치지는 사서(四書) 중 하나인 대학(大學)에서 밝힌 도를 실천하는 팔조목에 속하는 것이다. 학파에 따라 격물의 목적은 영원한 이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넓히는 데 있다고 하면서 치지가 격물보다 먼저라고 생각하였거나 오히려 격물이 치지보다 더욱 먼저라고 견해를 달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주자는 인간의 마음은 영특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천하에는 이치를 담지 않은 사물도 없으니 우리는 사물에 다가가 그 이치를 끝까지 캐물으면 깨달음이 온다고 하였다.

 

청년 시절 왕수인은 이 말을 믿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실천해 보려 했다.

 

왕수인은 자기 집 앞에 대나무가 있는 것을 마주해 그것을 뚫어져라 살펴보고, 대나무에 대한 책도 찾아보고 하면서 대나무에 집중하기를 7일이나 연속하다가 그만 쓰러지게 되었다. 이 경험 때문에 왕수인은 지식을 넓히는 것은 사물을 바로 잡는 데 있다고 하여 격물치지의 의미에 대해 주자와 다른 자신의 견해를 내놓게 되었다.

 

격물치지를 한다며 대나무에 집중하다가 병이 난 경험 이후 왕수인은 자기에겐 격물치지하는 자질이 없나 보다 하고 일단은 평범한 공부를 했다. 그는 과거시험에 합격했고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성격이 워낙 곧아서 조정에서 간사한 신하들의 횡포를 내부 고발한 충신을 편들다가 왕수인도 곤장을 40대나 맞고 멀리 오지로 좌천되었다.

 

그가 좌천되어 간 곳은 용장이라는 곳으로 기후가 험하고 주민들 대부분이 굴에서 살아가는 오지였다. 독충도 많아서 왕수인을 따라간 하인들이 병에 걸려 왕수인이 돌봐야 했다. 이런 혹독한 상황을 헤쳐 나가면서도 그는 돌관을 만들어 그 위에 앉았다 누웠다 하는 등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리를 깨우치려고 수행하기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왕수인은 되묻곤 해야했다. “제 아무리 성인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왕수인은 숲속에 초막을 짓고 살다가 바위굴로 들어가 살았다. 그러던 어느 깊은 밤, 그는 홀연히 격물치지의 도리를 깨닫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마치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일러주는 것 같았다. 어찌나 기뻤던지 소리치고 날뛰자 옆에서 자던 사람들까지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들은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왕수인이 말했다. 대답하기를 "내가 이전에는 격물의 도리를 깨닫지 못했는데 이제야 깨달았소"

 

그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 마음을 살피고 단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왕수인은 20년 전 대나무를 보다가 쓰러진 때를 떠올렸다. 그때 깨달았어야 하는 이치가 그 대나무에 있던 게 아니고 그것에 다가가려던 마음에 있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큰 도리란 곧 내 마음이다. 만약 마음이 없었다면 그 대나무가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왕수인의 이 깨달음은 심즉리(心卽理), ‘마음이 곧 이치이다’, ‘모든 사물의 이치는 내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마음 밖에서 사물의 이치를 구하면 사물의 이치는 없다고 하는 것으로, 이것은 왕수인의 양명심학의 중요한 명제가 되었다.

 

양명학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명제는 치양지(致良知)이다.

 

치양지는 만인의 선천적, 보편적 마음의 본체인 양지를 실현하는 일이다. 이는 양심을 닦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며, 불교수행에서 회광반조(回光返照)하여 공적영지(空寂靈知)를 밝히는 것과도 비슷한 뜻이다.

 

왕수인이 조정의 관리로 일하면서 자신의 양명심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던 중 그의 나이 56세 때 광시성에 반란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왕수인을 총독에 임명하여 반란군을 토벌케 했는데, 이 무렵 그는 폐병에 이질까지 겹쳐 간곡히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광시성으로 출정해야 했다. 다행히 왕수인의 토벌대가 당도하자 반란군이 자진 투항해 전투는 없었지만 나쁜 기후에 과로까지 겹쳐 왕수인은 피를 토하는 병을 얻어 이 병으로 죽게 되었다.

 

그의 병환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느 날 제자가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무슨 유언이라도 남길 말씀이 없으십니까?"
그는 눈을 깜박거리며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 마음이 밝으니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아마도 왕수인의 속엔 빛이 깨어 있었을 것이다. 속의 빛에서 생각과 행동이 일어나곤 했을 것이며, 그가 진리를 추구하며 산 것이나 깨닫게 된 것이나 깨달은 후 양명심학이라하여 가르친 것이 다 그의 속에 밝은 빛에서 일어났을 것이다. 왕수인뿐이랴! 세상의 모든 양명이 다 내면의 빛에서 나온다.

 

양명심학(陽明心學), 밝음이 발현하는(=양명) 마음 공부(=심학).

 

만일 왕수인이 속에 밝은 빛이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아는 왕수인은 없으리라.

 

인생들은 어떤 진리를 배울까, 어떤 종교를 하고 어떤 수행을 할까 생각한다. 선택을 잘해야 한다고 신경 쓴다. 왕수인도 그렇게 살던중 깨달아야 할 것이 대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다가가려던 마음에 있으니 마음을 살피고 단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그냥 마음이 아니다. 병환으로 죽어가는 왕수인을 더 할말이 없게 한 것은 빛이 깨어 있는 밝은 마음이다. 그냥 마음이야 누구에겐들 없는가! 동물들도 마음이 자기인 줄로 믿으며 살아가니 말이다.

 

 
백순임 명상화 <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