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헤드는 플라톤의 저작이 후대 철학의 일반 개념들 형성에 풍부하게 영향을 끼쳤다는 뜻으로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를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물의 본질적인 원형(原形)이라 하였고, 구체적인 현실의 사물은 이데아의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해 일시적인 속성을 지니지만, 이데아는 불변하며 항구적인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철학자는 가시적인 사물의 세계가 아닌 사물의 본성과 원형에 대한 인식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런 견해는 필자가 보기엔, 선사시대 철인들의 세계관과 뜻이 통해 있다.
이를테면, 플라톤이 이데아를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물의 본질적인 원형’이라고 한 것은, 천부경이 ‘무시일’ ‘무종일’이라 한 것과 뜻이 비슷하다.
‘이데아는 사물의 본질적인 원형이고, 현실의 사물은 이데아의 모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일'이 분화해 천지인이 나왔어도, '일'은 여전히 '시작되지 않은 일', 곧 진공이라고 한 ‘일 석삼극 무진본’과 뜻이 잘 통해 있다.
사물은 일시적인 속성을 지니지만 이데아는 항구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한 것은 ‘일’이 신묘하게 운행해 온갖 작용이 오고 가지만, 본체는 변함이 없다고 한 ‘일묘연 만왕만래 용변부동본’의 뜻과 비슷하다.
선사시대 철인들의 이러한 사상에서 오늘과 미래에 전승되어야 할 중요한 요점을 하나 간추린다면, 필자는 다음의 한 줄을 꼽겠다.
모습 없는 하늘은 하늘의 하늘이고, 하늘의 하늘은 곧 하느님이시니.
이 말은 “하느님은 진공이시고, 하느님이 사람 안에 넣어준 빛은 성분이 진공이다”라는 뜻을 가진다.
진공은 이 우주가 나온 조화자리이고, 진공요동이라는 생명 활동으로 진공빛을 수반한다.
이는 선사시대 철인들이 실상으로 주목한 바이고, 현대에 이르러 양자역학이 재확인한 사실이며, 자고이래로 뭇 철학과 종교와 수행에 영감을 준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의 회복에 대해 역설하고자 철인정치론(국가론)에서 ‘동굴의 비유(Allegory of the Cave)’를 상술했다.
동굴 비유에서 사람들은 지하의 동굴에 속박되어 있고, 어릴 적부터 손과 발, 목이 속박되어 있어서, 움직이거나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오직 동굴의 안쪽만을 바라본다. 동굴 입구의 아득한 위쪽에 불이 타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뒤에서 불빛이 비춘 때문에 사람들이 바라보는 앞쪽의 벽에 그림자가 생긴다. 이 벽은 곧 세계이며, 그림자들은 이 우주의 모든 물질적인 현상과 모든 정신적인 현상이다. 이 그림자들은 실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그림자' 세상에서 ‘이데아' 세계로 인류의 현실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창한 것이다. 그래서 이를 위해 동굴 비유에서 한 사람이 기어이 쇠사슬을 끊고 동굴을 탈출한다. 그는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 곧 ‘이데아’를 본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자신이 동굴 안에서 본 것은 그림자였음을 깨닫는다.
플라톤은 깨달음, 곧 ‘지(知)’를 통해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정신이 이데아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상기(anamnesis)이다.
이는 인간의 영혼에는 이데아에 대한 지(知)가 선험적으로 존재해 있다는 것이다.
필자 생각에 이것은 사람의 안에 '모든 것을 보지 않음이 없고 소리를 듣지 않음이 없는'(=참전계경) 영지의 빛이 깃들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둘째는 변증(辨證)이다.
인간은 사물의 본성에 대한 지적인 탐구를 통해서 사물들의 상호 관계를 발견하고, 사물의 본질을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는 본질을 추상하는 것에서 진일보해 본질과 연결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철인들이 말한 빛은 성분이 진공이고, 이 빛은 천지와 사람중에 실재한 것이다. ‘지(知)’는 진공의 빛이 현실 세상에 발현해 천지와 사람을 비추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즉, 진공빛이 발현하고 행동하는 데서 드러나는 규칙을 응용해 빛운영이 이루어진다.
셋째는 사랑(eros)이다.
특히 ‘지(知)’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인식을 항구적이고 보편적인 이데아의 세계로 단계적으로 이끈다. 이를테면, 빛에 이끌린 마음은 무지의 소멸을 앞당긴다. 그러나 인생들은 빛이 인생을 비춘 것은 '지' 때문이 아니라 '사랑', 자비 때문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영이 산 자, 곧 마음의 본성이 순수하게 깨어 있는 자만을 '살았다'고 하시고, 영이 죽은, 거듭나야 하는 자는 하느님께는 ‘없는’ 것과 같다. 혼, 곧 인생의 마음을 자기로 여긴 매 순간에 우리는 영이 죽은 상태이고, 그러한 우리는 영이신 하느님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사랑’으로 인하여 오시어서 혼을 자기로 동일시하여서 사실상 ‘없는’ 것과 같은 우리를 ‘있는’ 것처럼 대하신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런 것이다.
빛이 비춤은 곧 신의 사랑이다. 진공빛은 그 본질이 신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생의 마음은, 마음의 본성이 빛인 것을 통해 빛이신 하느님과 공명하고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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