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 천지의 본음/1부 1장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갈리아의 새

능 소 2022. 8. 15. 10:11

 
 
 
부엉이는 눈이 크고 밝아서 사람이 볼 수 있는 빛의 100분의 1 정도에서도 사물을 정확히 식별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엉이는 모두가 잠든 밤에도 홀로 깨어서 진실을 볼 수 있는 지혜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크고 밝은 눈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살펴서 신에게 세상의 동정을 알리고, 또 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전달하는 전달자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된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는 황혼 녘에 산책을 즐기는데, 항상 자신의 부엉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변증법으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자신의 저서 『법철학』 머리말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는, 후세에 유명해진 말을 하여 이후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철학을 상징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헤겔이 미네르바의 부엉이를 언급한 것은 사람들은 부산하게 살아가느라 일이 생긴 그 즉시에는 실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고는 하루가 저문 황혼 녘이 되어서야 낮에 일어났던 일의 의미를 깨닫는 식이니, 세상이 어둠에 휩싸이고 인간성이 사라져가는 시대의 황혼녘이야말로 지혜와 철학이(헤겔의 생각에는 '법철학'이) 본격적으로 필요할 때라고 말한 것이다.
 
‘보다, 자세히 보다, 드러내다, 명시하다...’ 라는 의미인 ‘觀’(관)이라는 글자는 부엉이가 부릅뜬 눈으로 보는 형상이라고 볼 수 있다.

觀(관)이라는 글자가 가진 의미의 하나인 ‘명시(明視)’에서 ‘명(明)’은 ‘밝다’, ‘밝히다’, ‘환하게’ 이고, ‘시(視)’는 ‘분명히 봄’, ‘자세히 살피다’, ‘조사하여 보다’는 의미여서 전체적인 의미는 ‘지혜의 빛을 비추어 보다’가 된다. 즉, ‘조견(照見)’해 본다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흔히 불교의 모든 법문을 압축한 법문이라 이야기되고, 다시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마침내 모든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났다’[‘조견오온개공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로 압축된다. 여기서 ‘오온'(五蘊)은 이 우주의 모든 물질적인 현상을 ‘색’(色)이라 하고, 모든 정신적인 현상을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 하고서 이 다섯 가지가 모두 ‘공’(空)한 것을 ‘조견(照見)하고 온갖 고통과 두려움에서 해탈할 수 있었다고 한 것이다.
 
헤겔은 부엉이가 부릅뜬 눈으로 지켜보듯 '법철학'이 그 역활을 할 것이라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성이 저문 시대의 황혼녘에서 빛을 발해야 하는 것은 ‘오온’을 비춘 ‘공’의 빛이어야만 한다고 필자는 보게 된다. 이는 반야의 지혜 광명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하여 해탈의 문을 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은 진공이시다’는 앎에서는 진공빛은 곧 참빛이 되고, 예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한 것에서 '진리'는 하나님의 참빛이 '조견'하여 비춘 것이 된다.
 
하지만 ‘비추어 본다’고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빛이 있어야만 비출 수 있다. 진공빛은 물질이나 정신의 빛으로 대체될 수도 없으니 인류사의 어두운 측면들에 대한 반동적 급진 사상으로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칼 마르크스 (Karl Marx)는 인류사에서 행해진 철학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뒷북이나 치고 실제적인 쓸모는 없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포이에르바하 테제』의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논리를 비판하여 말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에 대비되는 신조(神鳥)로 수탉(Gallia Rooster)을 제시하였다.
 
수탉이 울면 새벽이 오고 얼마 안 있어 동이 튼다. 그래서 고금동서에서 수탉은 새벽을 알리는 전령사였다. 어둠에서 벗어나 밝은 낮으로 가는 길목에서 밝은 아침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신비한 존재라 하여 신조라고까지 불린 것이다.
 
서양인들은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가 닭의 원산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닭을 ‘갈리아의 새’라고 불렀다. 그래서 고대부터 갈리아인들은 수탉을 새벽의 신으로 신성시했고, 수탉을 갈리아 군대의 기장(旗章)으로 사용했다.
 
마르크스가 헤겔의 ‘미네르바의 부엉이’ 개념에 맞서 ‘갈리아의 수탉’을 언급한 것은 ‘황혼 녘’에서 입씨름이나 하지 말고 ‘새벽’이 오게 하자고 외친 셈이다.
 
그러면 신조가 울어서 아침’이 왔는가?
 
고금동서에서 ‘빛’에 대한 말들이 있었다. 특히 종교들은 동어반복으로 빛의 신비와 거룩함을 설파하였고,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 종교가 위대하고 거룩한 종류인 것처럼 인식되게 자기 홍보적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무명의 타파를 역설하였지만 종교는 하나님의 빛이 광명한 시대의 아침을 열지는 못하였다.
 
해석에 머물기보다는 활동하여서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것은 진리적이지만, 마르크스가 그린 청사진에 따라 인간 세상에 이상향이 열리지는 않았다. 인간세상에는 천지와 사람에서 무명이 종식되게 한 것이 없었고, 앞으로 좋아질 기미라도 보여주는 것도 없었다. 빛을 가리킨 말이 있었지만 말이 가리킨 빛은 없는 상황이 연속되었을 뿐.
 
철학은 찻잔 속 태풍의 풍향 풍속을 논하고, 위대한 수행자들은 뒷짐 지고 태연자약 황혼 녘을 거니는 중인 것 같다. 애완 부엉이를 대동한 미네르바처럼 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눈을 부릅떠도 황혼은 깊어지고 수탉이 목청을 높여도 새벽이 오지 않은 것은 지금이 몇 시이기 때문일까? 대답할 말을 찾지 마라. 이유는 하나. 빛의 분량이 적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진공이시다’는 실상이 은닉되고, 빛의 현존에 대한 말이 곡해되어서 진공빛이 참 빛인 것이 시중의 잡다한 지식 중에 버려져 있다. 위대한 구슬이 먼지 속에 뒹굴 듯이 반야의 광명이 철학 사상으로 취급되고, 그리스도의 참빛은 인생들이 종교 활동하는 신앙심이 켠 정신 성분 빛으로 대체된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가진 성심과 재능과 재물이 있지만 그중 일부도 빛운영하는 데 쓰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