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 빛의 확산/4부 2장

왜 밝아야 하나

능 소 2022. 8. 14. 11:38

 

 

 

서기전 3500년경에 발귀리 선인이 있었다. 그가 학문을 배우고 도를 통하여 바야흐로 저()와 풍산(風山) 사이에서 노닐던 중 제천(祭天)의 예가 끝나는 것을 보고 지었다는 시, 원방각경(圓方角經)’이 후세에 전한다. 이 시는 한웅께서 원각을 이루시고서 서기전 3897년 갑자년에 신시 배달나라를 여신 것을 찬양해 일체삼용인 원, , 각의 무극, 반극, 태극의 원리를 100글자로 읊은 것이다.

 

이 시는 대일의 극을 이름해 양기라 한다는 말로 시작하고 큰 빈곳에 빛이 있으니 하느님의 모습이고라고 한 말로 이어지고, ‘큰 빛이 세상을 비추시니 뭇사람이 따른다고 한 말로 이어진다.

 

대일의 극을 이름해 양기라 한다. ( ) 큰 빈곳에 빛이 있으니 하느님의 모습이고

( ) 큰 빛이 세상을 비추시니 뭇사람이 따른다.

 

이 시가 말한 은 선사시대 철인들의 세계관, 곧 광명사상의 전승이다.

 

환은 전일의 광명이라.( ) 온 우주 만물에 앞섬을 말함이다.

 

한단고기 단군세기에 있는 이 말은 이 우주가 출현하기 전부터 진공은 진공 성분 빛현상을 수반하였음을 가리킨 것이다. 하느님의 광명에 주목한 이 시각은 훗날 성경의 창세기에서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기에 앞서 먼저 빛이 있으라 하셨다는 말이 되고, 불경에서는 대일(大一)여래께서 어디나 계시며(遍一切處) 두루 모든 것을 비추신다(光明遍照)고 한 것처럼 세상의 뭇 종교와 철학 수행에서 변주되었다.

 

다시 말해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진공의 세계를 모습 없는 하늘’ ‘하늘의 하늘’ ‘하느님이라 알아 그 빛에 주목한 사상은 인류의 원형적 사상이다.

 

그러한 이 빛이 밝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밝아야 하는가?

 

밝아지도록 빛운영하고, 빛운영해 천지와 사람에 밝아진 빛과 접속되도록 광명송 하고, 이렇게 하여서 밝아진 광명이 진정한 내 것이 되도록 빛을 자기화하기 위한 명상도 해야 한다는 것인데, 왜 그래야 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밝아지면 뭐가 어찌 되는가?

 

밝귀리의 100글자 시가 대일의 극을 이름해 양기라 한다고 한 말로 시작한 것에서 이해해보자. 이 말에서 대일은 곧 진공이다. ‘대일의 극은 곧 진공빛이다. 이렇게 읽으면 진공빛은 곧 양기(良氣)이다고 한 말이 된다.

 

진공의 생명 활동인 진공빛, 양기(良氣)’는 인생들이 이루는 생명 활동에서 '양지', '양능', '양심'이 되는 것이다.

저절로 아는 지혜인 양지(良知).

날 때부터 저절로 아는 능력인 양능(良能).

날 때부터 청정한 마음인 양심(良心).

...

 

이 빛은 선천에서는 태어나면서 타고난 것이지만 사람이 빛운영하고 빛이 이에 응답해 밝아지는 후천에는 이 빛이 밝아지고 자기화되면서 양기의 생명 활동이 활발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밝아야 하고, 밝아지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는 진공빛, 곧 참빛이 화자(話者)가 되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 말은 진공이 세상을 내고 진공빛이 사물을 비추어 진공 자신의 영생하는 생명을 주는 것에 대해 말한 것이다.

 

 

- 빛이 한 행동

 

 

중국 명나라 말기의 유학자 육상객(陸湘客)은 바람직한 삶의 자세로 육연(六然)이라 하여 여섯 가지를 들었다.


자처초연(自處初然), 고요하게 혼자 있을 때는 초연하라.

대인애연(對人靄然), 사람을 만날 때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나라.

무사징연(無事澄然), 큰일이 없을 때는 물이 맑듯 고요하고 투명하라.

유사감연(有事敢然), 결정을 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실행하라.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어도 담담하게 처신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 뜻을 잃었어도 태연하게 처신하라.


이 여섯 가지는 뜻이 좋아서 이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한편, 육상객이 말한 '육연'은 당나라의 선승 임제(臨濟)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어디서나 주인답게 산다면 곧 어디나 참되다"라 한 것과 그 정신이 유사하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선비의 말과 선사의 말이 뜻이 비슷한 것은 유불일체(儒佛一體)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되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임제의 어록 시중(示衆)편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에는 如大器者直要不受人惑, 隨處作主立處皆眞”(여대기자 직요불수인혹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 되어 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유혹에 빠지지 않고 곧을 필요가 있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주인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 자리가 모두 진리의 세계가 된다는 뜻이다.

 

임제 선사가 말한 그릇이 큰 사람은 누구일까?

 

임제는 그릇이 큰 사람이었을 것이고 큰 밝은이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큰 밝은이인만큼 큰 그릇의 사람일 수 있었다. 그의 내면에 신광(神光)이 밝아서 빛이 빛 자신을 아는 성자신해(性自神解)가 분명했을 것이며, 그리하여 빛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행동을 일상에서 살았을 것이다. 신광(神光)은 언제나 참되고 누구에서나 존재의 주체이다. 그러로 큰 밝은이 임제는 어디서나 자기 존재의 주체로 깨어서 살았을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의심하랴.

 

육상객이 짚은 육연’ 역시 연습해서 되는 것이기보다는 빛이 밝은 사람일 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지연> 백순임 명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