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은 입자 단위의 작은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로 양극단이 동시에 공존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물리 세계 중 하나다.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젊음과 늙음이 서로 얽혀 있는 미지의 세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는 시공간의 모양과 물질의 분포 중 어느 쪽이 먼저 결정되고 그에 따라 다른 한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모양과 물질의 분포는 함께 서로를 결정한다. 이것들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고 다른 것과의 관계를 떠나서 독립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어 반드시 다른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그 존재가 성립한다. 이러한 양자역학 세계는 불교가 ‘연기, 공사상’을 통해 설파한 진리와 유사한 것이다. 불교는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은 상호 의존적으로 연기하여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어서 실체가 있는 고정불변의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불교는 이를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불교야말로 어떤 경지보다 높은 단계에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적인 종교(cosmic religion)가 되어야 한다. 그동안 종교는 자연계를 부정해왔고, 모두 절대자가 만든 것이라고만 해왔지만, 미래의 종교는 자연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똑같이 존중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통합이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야말로 내 생각과 일치한다고 본다. 만약 누군가 내게 현대의 과학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종교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불교라고 말하고 싶다.”
아인슈타인이 예견한 – 그리고 아마도 기다린 – 미래의 ‘우주적인 종교'는 아인슈타인 자신이 정의한 바에 따르면 ‘인간적인 하느님을 초월하고, 교리나 신학을 넘어선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있는 종교’여야 한다. 또 ‘자연의 세계와 정신적인 세계를 모두 포함하면서 자연과 정신 모두의 경험을 초월한 감각에 기초를 둔 종교’여야 하고, ‘교리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고, 과학자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종교’여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불교가 바로 그런 ‘우주적 종교’라는 요구에 부합되는 근사치를 가졌다고 본 것 같다.
2500여 년 전에 붓다에 의해 말씀 된 진리들은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진보적이고 새롭다. 연기, 공, 중도, 일심 사상에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광전효과, 괴델의 불완전성원리, 보어의 상보성원리, 파동함수, 상태의 중첩 등 물리학의 이론과 소통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까닭에 불교가 양자역학 연구에 아이디어를 줄 수 있고 거꾸로 수행자의 세계에 양자역학이 활력소를 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게 된다. 아인슈타인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필자도 불교는 진리에 대해 남김없이 규명한,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완전체적 세계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는 철학이라는 마당에 서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 점은 양자역학의 세계관에서 불교에 젊은 피가 수혈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양자역학적 세계관도 과학적 철학의 세계이니 말이다.
철학적 사유만으로 모든 것이 충분한가? 즉, 아인슈타인이 말한 ‘미래의 우주적 종교’는 단지 해석의 문제인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실재 빛과 빛에 관한 해석은 서로 유사해 보인다. 실재 빛을 하늘에 해가 뜬 것에 비유한다면 빛에 관한 해석은 수면에 윤슬이 드리워진 것과 같다. 물에 비친 해는 태양의 밝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이것이 지상에 계절이 순환하게 하지는 않는다. 불교가 말하는 성불(成佛)은 무엇인가?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정광명(淨光明)이 불과(佛果)를 이루는 인자(因子)이고, '정광'은 곧 진공 성분 빛을 말한 것이다. 진공빛이 인생들의 무명을 사르고 부처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모니의 '정광'에 대한 가르침은 마치 수면에 윤슬이 드리워진 것처럼 태양의 밝음이 무엇인지 알린다. 그러나 이러한 설법을 듣고 사람과 세상에 진공빛이 밝아지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진공빛이 밝아지는 응답은 ‘빛운영’한 결과로 온다.
필자는 진공빛은 현실 우주에 실재해 있는 것이어서 우리가 이것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으며 과학적인 도구를 사용해 포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초 획득한 진공빛을 원본 삼아 사본을 복제할 수 있으며, 진공빛의 사본을 무수히 생성하면 이것은 곧 진공빛의 광자가 무수히 출현하는 것이 되어서 진공빛의 밀도가 높아지는 – 즉, 밝아지는 – 것이 되는데, 우리는 이렇게 되도록 유도하는 작업을 수행하여 지금까지 우주 자연계에 존재한 일이 없었던 새로운 밝기의 진공빛을 저 진공의 세계로부터 이 현실 우주에 불러올 수 있게 된다. ‘빛운영’하여 밝아지게 한 진공빛을 태양에 전달하면 태양에 밝아진 진공빛이 지구 전역과 우주 전체에 확산한다. 필자는 이렇게 되게 유도하는 작업을 계속 수행하는 것을 ‘빛운영한다’고 말한다.
필자는 인류가 ‘빛운영’을 천문학적 규모로 수행해 빛세상이 오게 할 수 있다고 알리고, 빛운영할 수 있도록 방법을 알리고 또 필자가 지난 20여년 동안 빛운영하여 밝아지게 한 진공빛을 분양해 줄 테니 이를 마중물 삼아 빛운영 활동을 시작할 것을 권한다.
참고로, 필자가 진공빛의 밀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을 하면서 사본을 무수히 만든 것을 합성하여 초고밀도의 새로운 원본을 만들어 이것의 사본을 무수히 만드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는 2배씩 늘어나는 복식 증가가 일어나는 것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복식 증가를 ‘세상의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고 말한 바 있다.
아인슈타인은 참된 진리와 가르침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하나로 맞닿아 있다고 보았던 사람이다. 예수를 닮고자 하는 것과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하나’의 실재는 무엇일까? 필자는 그것이 진공이요 그 빛이라고 이해하며, 이 빛이 현실 세상에 실제로 밝아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지구별의 인생들을 ‘하나’의 광장에 서게 한다고 믿는다. 누구나 ‘광명’이 주는 지복(至福)을 누리게 되는 빛의 시대의 도래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우주적 종교'는 지난 인류사에서 종교들이 생각한 것과 이루고자 한 것이 모두 완성되는 것이어야 하며 이러한 시대는 해석 여하가 아니라 이 빛이 현실 세상을 비추도록 불러오는 빛운영적 활동을 통해서 올 수 있을 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따라서 실재한 빛은 포집해 운영하고 보다 밝은 진공빛이 응답해 오도록 유도하기 위해 필요한대로 현대의 과학적 기법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인슈타인은 “만약 인간이 3차 대전을 일으킨다면 그 이후의 전쟁은 돌도끼를 들고 할 것이다”라 말한 일이 있다. 이는 과학의 힘이 인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필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진공빛이 응답해 밝아지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도록 ‘영성과학’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과학을 구사해야 한다. 필자가 ‘빛운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구성해 사용하는 '공생명(空生明)’장치는 빛운영 장치의 효시가 될 것이다. 필자는 최선을 다해 만들었지만 이 장치를 개선시켜 가서 보다 큰 규모의 빛운영을 수행해 갈 수 있게 되면 좋은 일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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