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나 사이의 나뭇잎

굉지의 역설

능 소 2024. 8. 21. 11:32

나기 전 죽은 후도 홀로 신령스러워

일체 부처가 여기서 나왔다네

미친 마음을 쉬면 바로 보이나니

가을물 맑은 하늘, 달이 떴구나.

 

身前身後獨靈靈

一切如來出此經

歇盡狂心便相見

水秋天淨月亭亭

-宏智正覺

 

.................

 

굉지정각(宏智正覺:1091~1157. 송)은 묵조선(黙照禪)의 거장으로 불리는 선사이다. 이 시는 ‘망념을 쉬기만 하면 된다’는 묵조선의 주장을 대변해 놓은 것이다.

 

‘묵묵히 비추어 본다’는 뜻을 가진 묵조선은 화두를 드는 간화선과 쌍벽을 이루는 수행법으로, 묵조선은 회광반조(回光返照)해 자기 안의 빛을 살핀다고 한 것이 특징이다.

내 생각엔, ‘자기 안의 빛을 살피’는 것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한 누가복음 11장 35절의 예수 말씀과도 다를 것이 없다.

‘미친 마음을 쉬는’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는 것이고, 이는 종교색도 걷어내야 진정하게 열리는 해탈의 경지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한 바로 그 경지이다.

 

하여서 종교색을 다 걷어내고 본다면 이 시가 말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바 '순수의식의 주의를 진공에 기울이면 진공빛이 응답해 의식에 밝아지는 빛 현상이 일어나는 것'과도 유사하다.

성분이 진공인 빛의 응답이 일어나려면 주의를 진공에 기울이는 것이 관건이 되는데 ‘나기 전 죽은 후도 홀로 신령스러워’라고 한 시구는 진공이 사물의 생주이멸(生住異滅)과 생명체들의 생노병사(生老病死)에서 초월하여 있는 것을 가리켰다.

빛은 거기서 비추어 온다.

 

흔히 선(禪)을 격외(格外)라 하고 불립문자(不立文字)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종교나 수행이라고 하는 고상한 인조물(人造物)도 세우지 않은, 그야말로 청정무구(淸淨無垢)한 본래 마음의 빛나는 상태를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건 묵조선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놀라운 역설이지 않은가! 그런 주장을 담은 시에서 진공을 불러 '모든 부처'(一切如來)라고 이름하였다.

 

 

<2023년 12월 14일 새벽의 창밖 풍경> 사진=레몬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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