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나 사이의 나뭇잎

무궁화는 환화(하느님 빛의 꽃)

능 소 2024. 6. 7. 16:23

무궁화의 영명 ‘Rose of Sharon’은 ‘신의 축복을 받은 땅에서 장미꽃처럼 아름답게 핀 꽃’이라는 의미이고, ‘샤론의 장미’는 '하나님의 참빛' 예수를 상징한다. ‘참 빛’은 세상이 생겨나기 전부터 밝은 하느님 자리의 빛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런 해석은 자연히 환단고기 상편에 ‘우리 환족이 세운 나라가 가장 오래되었다(吾桓建國最古)’라고 하고서 ‘하느님은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 계시고, 홀로 조화를 부리는 신이시고, 광명으로 온 우주를 비추시고, 권능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영원히 사시고, 두루 모든 것을 살피시며’라 기술된 것과 그 의미가 하나로 연결된다.
 
성경에서 태초에 계신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고 하시자 빛이 있었다고 한 것은 물질적인 빛, 즉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빛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인생들이 마음 활동한 정신적인 빛을 말한 것도 아니다. 이 빛의 비밀은 ‘하느님은 진공이시다’고 알고 ‘참 하늘은 진공의 세계이다’고 알때 자연히 풀린다.
 
이를테면,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있은 것은 '하나님은 진공이시다'는 선도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는 일신인 절대 진공 본체가 물리적인 진공, 진공요동, 진공요동에 따른 진공 자신의 빛 현상이라는 세 작용, 곧 일신이 삼신 활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하느님을 인격신으로 믿은 사람이라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의 파천황적 변화가 있어야만 생각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아무도 생각해보지 못한 생각을 처음 한 것이 아니고 저 상고시대 인류 선조들의 보편적인 세계관 하느님 사상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원시반본인 것이다. 삼일신고가 하느님 계신 하늘을 가리켜 ‘하늘은 형체도 질량도 없다’[天無形質]라고 하고 ‘비고 비었으며 공하고 공하다’[虛虛空空]고 하여서 하늘은 곧 진공의 세계라고 가리킨 것이나 참전계경이 진공의 세계와 이 우주자연이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하느님 계신 천국 하늘은 지구상의 천공이나 저승의 하늘 등의 뭇 하늘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여 ‘해, 달, 별, 바람, 비, 벼락은 모습이 있는 하늘이고 하늘들의 하늘은 모습이 없는 하늘이고 하느님이시다’[日月星辰 風雨雷霆 是有形之天 無物不視 無聲不聽 是 無形之天 無形之天 謂之天之天 天之天 卽天神也]라 하여 진공의 세계가 바로 하늘이고 하느님이라 한 것이 바로 인류 선조들의 세계관이고 하느님 사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계관 하느님 사상에서 알면 성경 말씀이 처음 시작되면서 하나님이 말씀해 빛이 있은 것, 곧 성경이 말한 ‘참빛’은 그 빛의 내용이 반드시 진공의 빛이어야 하고, 이 빛은 환단고기의 삼성기에서 ‘하느님이 사백력(斯白力)의 하늘에 계시며 광명으로 온 우주를 비추셨다’고 한 것과 종류가 다른 빛일 수 없다. 그리고 사백력의 하늘에서 온 우주를 비춘 광명이 지구 행성에 인생을 옷 입어 온 것이 환인이었고, 환웅이었고, 단군이었으며, 예수 또한 그러한 빛의 존재로서 온 것이라는 말이게 된다. 예수가 ‘참빛’으로 오셔서 가르친 것은 빛의 길인 것이나 주기도문을 가르쳐서 인생들이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도록 가르친 것은 곧 하늘에 있는 빛의 나라가 지상에 개천되기 바라라고 한 것, 그리고 예수 자신이 무궁화로 상징된 것 또한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고대 한민족의 세계관 하느님 신앙의 연장선에서 예수의 복음의 정체가 이해되는 사례는 무궁화가 하느님 빛의 꽃을 가리킨 상징인 것뿐 아니라 관심 갖고 찾아보면 성경의 도처에서 그 자취가 발견된다. 예수가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요한도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도 물로 하는 '세례'는 그 연원이 부도지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고대로부터의 유습과 관계된다.

쿰란 공동체는 세례 요한이 영향받았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서려고 하루에 두 번 신앙 의식을 행하기 전에 흘러내리는 물에 몸을 씻었다. 세례 요한이 물로 ‘세례’한 것또한 필자 생각엔 부도지 이야기에 나오는 '계불'(수계제불)의 유습(有習)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부도지의 이야기에서는 마고성 사람들이 ‘오미의 변’으로 본성을 잃게 되었고 이를 회복하고자 이른바 ‘복본(復本)을 기약하게 되었다. ‘복본’은 ‘죄 씻음’이고 이를 위해 깨끗한 물로 씻어 목욕하는 것, 곧 '계불'(수계제불)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환인의 환국과 환웅의 신시 배달국, 단군 조선의 백성들이 삼신께 기도할 때 목욕제계하는 풍속이 되었고 또한 ‘관정’, ‘ 세례’ 등의 종교의식으로 변형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에세네파의 ‘세례’ 역시 물로 깨끗이 씻어 새로이 태어난다는 것으로 이는 신생 또는 재생의 종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인데, 필자는 지금 신생, 재생이라는 기독교 용어의 의미가 부도지의 이야기가 말한 ‘복본’과 의미가 연관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되겠다. 고금동서의 여러 종교가 서로 다른 말인 듯이 저마다 설교하지만 그 내용에서 보면 설교들이 물꼬를 댄 진리의 수원(水源)은 결국 진공이고 그 빛이라는 것이다. 진공이야 말로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일(一)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예로부터 수도하는 사람들이 태양을 환(桓)의 상징으로 삼은 원리도 참 하늘은 진공의 세계이고 하느님은 진공이시며 '환'은 하느님의 빛을 말하기 때문인 것이다.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일(一)은 널리 공유되었다. 다시 말하면 진리 실상을 찾은 밝은이들은 진공이신 하느님의 광명에 동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BC 2세기부터 AD 70년까지 이스라엘의 사해 북서쪽에 있는 건조한 평원인 쿰란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사회와 격리된 채 공동체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派, Essenes)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서 ‘빛’, ‘빛의 자녀’가 강조되었다.

그들은 육체는 타락하기 쉽고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영원한 것이 아니지만 영혼은 불멸하고 영생하는 것이라고 알았다. 그들은 ‘가장 신비한 하늘로부터 생겨난 영혼은 내재하는 어떤 갈망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처럼 육체 안으로 던져진다’라고 생각했고, 육체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었을 때 오랜 예속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위로 올라간다고 여겼다. 필자 생각에 그들의 이런 생각은 개인의 몸과 마음인 혼육을 자기로 동일시하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는 지양되어야 하며 하느님의 빛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영이 된 것이 깨어나 영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고대 선도 철학에서 심기신(心氣身)을 세 가지 허망한 것이라 하여 삼망(三妄)이라 부르고 성명정(性命精 : 필자 생각엔 천부사상/광명 철학에서 성명정은 성경이 말한 ‘영혼육’과 그 의미가 같다. 즉, '영'이 중심이 되고 '혼육'이 영에 동화된 상태가 성명정 삼진이 인생에 이루어진 모습이고, 이것이 성통공완한 이의 모습이다.)을 삼진(三眞)이라 한 것과 같다.
 
쿰란 공동체 에세네파 사람들이 태양에 주목한 것도 유사한 태도였다. 그들은 동트기 전에 기상하였으며 해가 뜨기 전까지는 불경스러운 주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해가 떠오르도록 갈구하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기도하였다. 그들에게 태양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들은 공동체에 입회할 때 목욕 시에 입을 앞치마(apron)와 흰 의복과 작은 삽을 받았는데, 작은 삽은 구덩이를 파서 태양 광선으로부터 자신의 배설물을 덮는데 사용하였다. 태양을 신성시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필자 생각에 이 태도는 환(桓)사상/천부문화에서 ‘일월성신’을 모습이 있는 하늘이라고 하여 자연의 사물을 하늘의 일종으로 여긴 것과 맥락이 같다.
 
에세네파 사람들의 태양에 대한 태도는 훗날 기독교인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필자 생각엔 그들의 태양에 대한 태도는 환인, 환웅, 단군으로 계승된 상고시대 광명사상/천부문화와 연관된다. 그들은 태양을 믿은 것이 아니라 햇빛이 '참빛'의 파편을 전달하는 것에 주목한 것이었다. 태양은 하나님이 비춘 광명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환단철학에서 ‘태양은 광명이 만나는 곳’인 것과 관계되고 태양+하느님의 광명이라는 빛의 합일(合一)에 주목한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서 빛과 인생의 합일을 소망했던 것이라는 말이다.
 
당시 에세네파 사람들이 ‘가장 신비한 하늘'이라 여긴 것은 필자 생각엔, 이 우주 자연이라고 하는 '모습이 있는 하늘'을 발생시킨 '모습이 없는 하늘'이고 ’하느님‘인 '하늘들의 하늘', 곧 진공의 세계를 가리켰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보면, 에세네파 사람들의 빛 철학은 환인, 환웅, 단군의 광명사상과 교의의 계보가 연관된다. 에세네파 사람들이 ’영혼이 가장 신비한 하늘로부터 와서 육체 안에 깃들었다‘라고 한 것은 진공이 비춘 빛, 곧 환단고기의 표현을 빌리면 ’하느님이 사백력의 하늘에 계시며 광명으로 온 우주를 비추어‘ 그 빛이 내려와 ‘사람’ 안에 ‘생령’/진아(眞我)가 된 것, 곧 ‘일신강충(一神降衷)’ 한 것을 말한 것이다.
 
기독교에서 쓰이는 용어인 강생(降生, incarnatio)은 하나님이 사람이 된 사건을 가리킨다. 성육신(成肉身)이라고도 부른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강생한 하나님 즉, 하나님의 공현(Epiphany)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강생’은 필자 생각엔, 삼일신고가 말한 ‘일신강충(一神降衷)’과 같은 것이다. 성경이 말한 ‘성육신’이나 불경이 말한 ‘응신(應身)’/화신(化身)을 바로 그런 의미이고, 이는 빛이 빛의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이라고 하는 생물학적 탈것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인생들은 몸과 마음의 사람을 자기로 동일시하지만 사람 안에 들어선 빛이 진정한 자아라는 말이고, 이로부터 모든 구도의 여정은 빛으로 향한 여정이게 된다는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환인이 환국 백성들에게 불을 사용하는 방법을 처음 가르쳤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때는 인류가 아직 문명인이 되기 전이었다. 그런데 그런 원시적 시절에 환인은 이 가시적인 우주의 근원적인 배경이 진공인 것을 알았으며 천부경 삼일신고에서 이를 설했다. 진공이 우주 만물의 출처이며 특히 사람들에게는 진공이 비춘 빛이 내려와서 사람 안에 자성(自性)/진아(眞我)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 이 빛이 환히 깨어난 큰 밝은 이가 되도록 성통공완(性通功完)하는 경로인 빛의 길를 제시해 준 것이다.

‘성통공완’하면 어떻게 되는가? 삼일신고는 성통광완하여 철인(哲人)이 되어서 하느님과 더불어 하늘의 대길상(大吉祥) 대광명(大光明)을 비추는 활동을 협업하게 된다고 알려주고 있다. 필자 생각엔 진아인 빛이 깨어나서 빛으로서 빛의 일을 하는 것이 대광명을 비추는 것이고, 이는 고금동서 종교들이 가르치는 바였다고 알게 되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앎은 한민족의 상고시대 환(桓) 철학에서 기원한 것이라는 발견을 할 수 있게 된다.
 
 

무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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