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 천지의 본음/3부 2장

광명송들

능 소 2022. 8. 22. 09:21

 

 

- 빛의 꽃 광명송

 

 

20161210, 이 문구를 가사로 채택하여 광명송을 만들었다. 이 광명송의 이름을 빛의 꽃 광명송이라 한 것은 예로부터 무궁화가 빛의 꽃’(桓花)라 불렀기 때문이다. 빛의 꽃 광명송이 최초의 광명송이다. 이 광명송에 대해서는 앞의 글에서 말하였다.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

[빛의 꽃 광명송] 2016

 

 

 

- 한강수 광명송

 

 

빛운영에 관한 보고서1권에서 밝혔듯이 2015103일부터 발원지로부터 하류까지 한강 전체가 진공 빛을 띠고 흐르도록 빛운영하였다.

 

한강에 빛운영한 2015년은 아직 광명송을 만들어 쓰기 전이다. 그래서 20161210일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문구를 가사로 채택해 최초의 광명송을 만든 후 이어 한강에 대한 빛운영을 함께하자는 권고의 차원에서 한강수야 샛별처럼 흘러라라는 문구를 만들어 이 광명송을 하면 광명송한 사람과 한강이 밝아지게 하였다.

 

한강수야 샛별처럼 흘러라

[한강수 광명송] 2018

 

 

 

 

- 본태양 광명송

 

 

생명이라는 말은 +으로, 生(생)생겨나다’ ‘태어나다의 뜻이고 (명)은 목숨, 곧 생명체의 생명 현상인 낱생명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 점에서 生命(생명)은 낱생명을 가리킨 말로 적합하고 모든 생명을 가리키는 개념인 온생명의 뜻을 가지기에는 적절치 않은 표현이다.

 

생명이라는 말은 특히 태어나지 않고 스스로 있는 하느님의 영원한 현존을 가리키기에는 부적합하다.

 

산 것이라 한 것에서 역시 개체를 가리킨 것이니 이 역시 낱생명들을 가리키기에 적합하다. 그러나 은 낱생명과 온생명 전부를 가리킬 수 있는 순수 지칭이다. ‘은 진공의 끝없는 생명 활동, 곧 하느님이 영생하시는 존재인 것을 가리킬 수 있다. 그래서 을 광명송의 가사로 채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생을 가리킬 수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은 조물주로서 피조물 세계의 모든 물질적인 현상의 빛들과 모든 정신적인 현상의 빛들이 있게 하신 빛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광명송의 이름을 '본태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광명송을 2019년에 지었다.

 

 

[본태양 광명송] 2019

 

 

 

- 이마에 인 치는 광명송

 

 

부처가 설법 중에 미간백호 광명을 놓았다고 한 것은 이마에서 빛이 비추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간백호광을 놓는 것이 단지 부처만의 능력인 것은 아니다. 누구나 사람의 안에 진공빛이 내재해 있으며, 이것은 빛이 활동하는 현상이다.

 

하지만 그간에 인생들은 무명한 중에 있었고 빛에 대한 관심이 없이 살았기 때문에 사람 안에 내재된 빛은 미약한 수준이었고 비활성 상태에 있었다. 대개의인생들은 이런 상태였으나 부처는 광명의 존재로 응신하여 온 존재이므로 빛이 밝았고, 빛의 할동이 뚜렷하고 활발하였다.

 

수행하여서 극한점을 넘어서면 이마에 있는 제6차크라, 곧 인당(印堂)에서 빛이 깨어난다고 이야기되었고, 이렇게 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기존의 수행을 해서 빛이 깨어나 빛이 이마에서 비추어나가는 단계가 되는 사례는 없었다. , 기존에 제시된 종교와 수행은 내재된 빛이 깨달음이 촉발할만큼 밝은 사람이면 그가 깨달음에 이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지 기존의 종교 수행이 천지와 사람이 광명해지도록 상황을 진전시킨 것은 아니었다.

 

빛운영은 진공빛이 천지와 사람에 깨어나 밝아지게 한다. 빛운영한지 11년이어서 2022년 현재는 태양에 밝아진 빛이 지구 전역과 인생들에 두루 밝아져서 사람 안의 진공빛도 덩달아 밝아졌다. 그리하여 안에 밝아진 빛이 활동해 이마를 통해 비추어 나올 수 있는 빛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앞으로 빛운영이 더욱 진전될수록 인생들의 이마에서 광선이 뻗쳐 나와 세상을 비출 것이다.

 

하늘 이마 빛의 문, 환히 여시라

[무지개광명송] 2019

 

 

 

- 씨앗 광명송

 

 

성경의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는 빛과 다른 것을 말한 것이다. 빛을 가리킨 말이 있지만 그 말이 가리킨 빛은 없는 것이다.

 

가라지는 밭에 자라는 강아지풀이다. 이것은 농부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지만 밭에 있는 것이다.

 

가라지의 뜻을 넓은 의미에서 새긴다면, 빛운영이 불러와주고 광명송이 이끌어 온 것에 영향 받아 전과 다르게 밝은 빛을 띠게 되었지만 이 빛이 아직 진정한 내 것이 되지 않아서 빛에서 생각과 행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 무늬는 빛인데 빛의 행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 빛을 띠게 되었지만 빛의 생명 활동을 함께 살지 않는 것도 빛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마치 그런 내용이면 그런 것이 알곡에 섞여 수확되지 않게 가려낼 것이라고 하였다.

 

성경이 말하는 알곡은 빛이신 하느님을 닮은 신성한 성분의 광자(光子)들이다.

 

 

성경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느님의 빛은 해달별이 낸 물질적인 빛이나 인생들이 머음 활동한 정신적인 빛이 아니라 천지 창조 전부터 밝은 빛이어서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5)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세아4: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람 안의 빛이 있는 것을 돌아보라 하고, 빛의 행동을 하라고 권하고, 빛의 시대가 도래할 것임을 알린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데살로니가전서 5:5).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이사야 60:1).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1:24).

 

그러나 오늘날의 인생들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곧 참 빛과 빛 아닌 것을 구분치 못하는 중에 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 : 밭은 빛이 성장하는 자리이다. 성경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참 빛이시고,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등 진공빛의 성장에 관한 말씀을 일관되게 주신다.

 

마가복음41~41.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가 되었느니라

 

밭은 곧 빛이 성장하는 곳이다.

 

열매가 영글다 씨가 여물다 행동이 철 들다 빛이 되어라

[씨앗 광명송]

 

 

 

- 정화 광명송

 

 

광명송은 진공빛이 밝아지는 효과가 생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다. ‘정화(淨化) 광명송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광명송은 암()의 발산하는 정보가 정화되는 것 같은 질병의 좋지 않은 기운을 정화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러므로 질환이 있는 사람에게 이 정화 광명송을 많이 하면 좋다.

 

한 생각 맑은 눈, 구름 없이 밝다

[정화 광명송] 2017

 

 

 

- 축귀(逐鬼) 광명송

 

 

금강반야바라밀경의 산스크리트어 명칭 와즈라체디까 쁘라갸빠라미따 수뜨라(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에서 와즈라는 금강이라는 뜻과 벼락(번개)이라는 뜻을 가졌다. 구마라습은 한문으로 번역할 때 금강불괴의 뜻을 살려 경전의 이름으로 삼았는데, 그때 벼락을 선택했더라면 천둥과 섬광을 가진 이름이 되었을 것이다.

 

와즈라가 가진 이런 의미들을 동시적으로 모두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금강에 비유한 반야의 지혜는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보는데서 성취되는 것이고 이 지혜는 진공이 현존한 것을 성찰할 때 밝아진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진공에 관해 과학이 성찰하는 바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에서 진공은 텅 빈 공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진공의 양자적 요동(quantum fluctuation)에서는 가상입자가 생겨나 자유롭게 움직이다가 에너지-시간 불확정성에 위배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일이 부단히 계속된다. 이 우주가 열린 빅뱅도 바로 이런 진공의 상전이에서 일어났다. 또 진공이 요동치는 창조 진동은 진공 성분의 투명한 밝음이라는 빛 현상을 수반한다.

 

여래의 진신(眞身) 비로자나가 어디나 계시어 변일체처(遍一切處)하고 두루 모든 것을 비추어 광명변조(光明遍照)하는 것도 진공의 시작도 끝도 없는 편재와 그 투명한 빛 현상을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이해에서 와즈라의 뜻을 금강으로 새겨서 금강불괴를 음미하고, 또한 벼락으로도 읽어서 그 천둥소리를 마음속의 분별, 집착, 번뇌 등을 부숴버려 깨달음으로 이끄는 반야 지혜이신 부처님 음성으로, 그 섬광을 불성인 정광명이 번쩍여 무명을 불살라 없애주는 것으로 지각할 수 있다.

 

모습 없이 계시고

벼락을 타셨도다

어둠 소멸하여라

말씀 뇌성

골수에 치시도다.

[축귀 광명송] 2017

 

 

 

- 하늘 광명송

 

 

해달별은 깨어서 빛을 뿌린다

[하늘 광명송] 2020

 

 

 

- 무궁화 선언 광명송

 

 

하느님은 진공이시다

만물을 짓고 품으시어서

어디에나 계시며 모든 것을 비추신다

나는 하느님의 빛에서 생각과 행동을 일으켜서

세상의 아침에 무궁화로 피리라

[무궁화 선언 광명송] 2019

 

 

 

- 상 없는 연결 광명송

 

 

우리는 평소 빛을 자기화하는 명상을 하는 방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순수의식으로 깨어서 진공이 존재한 것을 주시하십시오. 주시했으니 뭔가 보이는 것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말고 주시 그 자체로 깨어 있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진공 빛의 응답이 일어나서 순수의식이 밝은 빛을 띠게 됩니다."

 

빛 운영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환경과 세상 전체가 밝아지도록 빛을 불러온다. 빛은 진공으로부터 여래(如來)에 온다. 빛을 자기화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빛과 합일해 빛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빛운영은 천지와 사람 전체에 진공빛이 밝아지게 불러오기 위한 보편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고 광명송은 천지에 밝아진 빛과 개별적으로 접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빛운영과 광명송, 그리고 빛을 자기화하는 명상은 '세 가지의 중요한 빛의 길'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해에서 보면 하느님은 진공이시다, 가만히 앙망하면 빛을 비추신다고 한 이 광명송은 빛의 응답을 받아 밝아지는 원리가 어떤 것인지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빛이 자기화되게 하려면 순수의식으로 진공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 곧 빛의 우주이신 하느님과 소통해야 한다는 자각에 이르도록 깨우쳐주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광명송의 이름을 '상 없는 연결'이라고 하는 것은 순수의식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진공을 관찰할 때는 반드시 의식 본래의 청정함으로 깨어서 해야 한다. 순수의식은 종교적 심리도 초월한다는 것이다. 마음 활동해 하느님에 관한 개념이나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인조물을 만들고서 그것을 하느님이라고 대체하는, 일종의 우상 제작이 될 수도 있으므로 이러한 마음 활동조차 일어나지 않은 마음의 순수한 본성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진공이시다.

잠잠히 바라보면 연결이 복원되고

가만히 앙망하면 빛을 비추신다.

[상 없는 연결 광명송] 2019

 

 

 

- 불습성 광명송

 

 

부엌에서 불붙이다 별안간 눈 밝으니 이로부터 옛길이 인연 따라 맑구나! 누가 나에게 서래의(西來意)를 묻는다면 바위 밑 샘물 흐르는 소리에 옷 젖는 일 없다 하리한암스님의 오도송에 있는 구절이다. 이 시구는 샘물 흐르는 소리에 옷 젖는 일 없다고 한 것이지만 샘물소리도 젖어 있는 것이 아니다는 뜻으로 새겨도 읽어진다. 그래서 이렇게 읽은 것을 광명송의 가사로 삼기로 한.

 

바위 밑 샘물소리 젖는 일 없다

[불습성 광명송] 2020

 

 

 

- 무근수 광명송

 

 

보배 칼을 마음대로 쓰고 밝은 거울은 앞뒤가 없도다 두 가지 몰아 한 바람이 뿌리 없는 나무에 불어 닿는다” [風吹到無根樹(풍취지무근수)] 만암선사의 오도송이다.

 

뿌리 없는 나무는 선사들이 흔히 쓰는 격외적 비유이다. 결국은 빛의 성분이 진공인 것에 이른다. 있지만 비었고 활동하지만 함이 없으니 묘유의 세계이고 신령한 현존이다.

 

바람이 뿌리 없는 나무에 불어 닿는다

[무근수 광명송] 2020

 

 

 

- 일물장영 광명송

 

 

수심결(修心訣)한 물건 길이 신령하다’ [一物長靈]고 한 것은 마음이 부처요 성품이 진리라 한 것이다. 청정법신인 순수의식, 곧 부처마음이 마음이다. 이 말은 색신 (인생의 몸과 마음)은 거짓이라 생함도 있고 멸함도 있지만 참 마음인 부처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없어지지도 아니하고 변하지도 아니한다. 그래서 일백의 뼈는 무너지고 흩어져서 불로 돌아가고 바람으로 돌아가되 한 물건은 길이 영령하여 하늘도 덮고 땅도 덮었다고 한 것이다. 이 한 물건이 진공이요 진공빛이다.

 

그러므로 한 물건이 길이 신령한 것은 곧 진공 성분 빛 그 자체인 진공이다. 천지와 사람은 시간과 공간에 속한 것이고 진공빛은 영원과 무한인 것을 가리켰다.

 

한 물건 길이 신령하다

[일물장영 광명송] 2020

 

 

 

 

- 천부 구구단 광명송

 

 

영은 일’(0=1)이다.

 

’(0)은 천부경 81글자가 무시(無始)’로 시작하고 무종(無終)’으로 끝나는 것에서 ()’가 이에 해당하고, 진공을 가리킨 말이라고 알 수 있다. ‘’(1)’(0)의 절대성을 말한 것으로, ‘은 불가분한 하나다. 또한 ''의 빛이다.

 

일은 삼’(1=3)이다.

 

진공이라고 하는 하나의 본체가 진공, 진공요동, 진공빛이라는 세 작용으로 현현한 것이다. 작용은 본체의 행동이다. , 진공이 요동쳐서 진공빛을 수반한 것이 이것이다. ‘모습 없는 하늘’(진공)이 곧 하느님이라고 알았던 선사시대 선도의 밝은 이들은 본체 하나가 세 작용으로 현현하여 창조를 주관하는 것에 주목해 을 중요시했다. ‘하늘에 삼신이 계시어 천지인을 내셨다고 한 것이다. 만일 진공이 텅 비어 있기만 하고 작용하는 것이 없었으면 천지인 삼극이 발생할 수 없었을 것임을 안 것이다.

 

삼삼은 구‘(3×3=9)이다.

 

본체 하나가 세 작용을 일으켜서 멀리는 우주들을 열고(=’하늘들'/다중우주) 가까이는 우리 우주의 온갖 사물과 정신의 세계를 연 것에 대하여 천부경은 일적십거무궤화삼(一積十鉅無櫃化三)’, ‘하나가 쌓여 가없는 삼을 이룬다고 말씀하였다고 음미할 수 있다. 이는 진공의 생명 활동은 계속되고, 창조하는 진공이 자기복제를 끝없이 일으키는 것이라 감상할 수 있다.

 

구구 팔십일(9×9=81)이다.

 

천부경은 진공을 ’(1)이라고 불러 이야기를 시작하고서, 천부경의 말씀을 경청한 지구별의 인생들이 '하늘' '하느님'이신(01) 빛을 앙망하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이 빛이 마음의 본래 모습으로 사람 안에 있고 천지에 편만한 것을 직시하라고 당부했다. 이것이 앙명인중천지일의 뜻이고 천부경을 말씀한 이유이다. 그리고서 천부경은 '영은 일'(0=1)로 돌아가 81글자 이야기를 마치고 ''의 본음(本音)인 진공의 고요로 돌아간다.

 

천부경에 이런 뜻이 있다고 알기로 한다면, ‘앙명인중천지일이라 한 것에 주목하게 되고, 진공빛이 사람 안과 천지에 편만한 것을 직시해 보게 된다. 그리고 빛운영하면 천지인에 진공빛이 밝아지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영은일 일은삼 삼삼은구 구구팔십일

[ 천부구구단 광명송 ] 2022

 

 

 

- 아름다운 만남 광명송

 

북 치는 이와 비파 타는 이가 한 집에서 서로 만났다. 그대는 버들 언덕을 거닐고 나는 나루터에서 잠을 잔다. 강 위엔 때늦은 성근 비 지나가고 봉우리마다 푸른빛이 노을 하늘에 닿아 있네.”라고 읊은 야부도천의 시가 있다. 이 시가 푸른빛이 노을 하늘에 닿았다고 한 것은 만남이 가진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가리킨 표현이다.

 

이러한 비경(秘經)을 가진 아름다운 만남이 일어나기를 축복하는 말이 되도록 의 한 구절을 광명송의 가사로 삼았다.

 

봉우리마다 푸른빛이 노을 하늘에 닿았다

[아름다운 만남 광명송]

 

 

- 견성(見性) 축복 광명송

 

자기 본연의 천성을 보는 것을 성품을 본다고 하여 견성(見性)’이라 말하게 된다. 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야기가 시작되는 첫 자리의 전경을 보는 일은 이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

 

파란 우산을 손에 들고 더러운 양 떼를 몰며, 치즈 냄새 풍기는 옷을 입고서, 감탕나무, 떡갈나무, 혹은 모과나무 지팡이를 짚고서, 당신은 언덕 위의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털이 억센 개와 불거진 등 뒤에 거무스름한 물통을 짊어진 당나귀를 앞세우고. 당신은 마을의 대장간 앞을 지나가리라. 이윽고 당신은 향기로운 산에 이르리라, 당신의 양 떼들이 흰 덤불처럼 풀을 뜯어 먹고 있을. 거기엔 안개가 지나가며 봉우리들을 감추고, 거기엔 목털이 빠진 독수리들이 날고 밤안개 속에 빨간 연기들이 피어 오른다. 그곳에서 당신은 보리라 평온한 마음으로 신의 령이 이 무한한 공간 위에 떠돌고 있음을프란시스 잠의 우산을 들고서라는 시이다.

 

이 시는 문자적인 목자를 말하면서 상징적인 목자의 하는 일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 점을 읽으면, 이 시가 당신은 보리라고 말한 것은 하나의 견성(見性)인 것이 된다.

 

당신은 보리라 평온한 마음으로

[견성 축복 광명송] 2020

 

 

- 빛으로 인도 광명송

 

 

목자(牧者)는 문자적으로는 양을 돌보는 사람을 말하는데, 상징적으로는 신이건 혹은 인간이건 사람을 돌보는 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로 불림을 받았다 (49:24). 모세와 바사 왕 고레스도 하나님의 목자로 불림을 받았다 (63:11).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목자라고 부르고 있다 (13:20). 목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나온다. 이와같이 신구약 모두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들은 목자라 칭함을 받고 있다.

 

이와같이 목자는 가르쳐 이끈다는 뜻의 인도(引導)와 관계된다. 그렇다면 어디로 이끄는가?

 

빛의 길은 성경에서뿐 아니라 쿠란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르쳐졌음을 보여주는 자취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빛에서 난 것이고 빛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그 사실을 보여주는 자취가 보인다면 그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래서 그렇게 볼만한 것들이 발견되기 바라면서 쿠란에서 조사해보았다. 그런데, 빛을 가리킨 말로 여겨지는 것은 그 분량이 많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쿠란 24- -누르() 장은 진공빛을 가리킨 말씀이 분명하다고 보인다. 그래서 안-누르 장의 말씀에서 빛 위에 빛을 더하도다라는 구절을 택해 광명송의 가사로 삼았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빛이라 그 빛을 비유하사 벽 위의 등잔과 같은 것으로 그 안에 등불이 있으며 그 등불은 유리 안에 있더라 그 유리는 축복받은 올리브 기름으로 별처럼 밝게 빛 나도다 그것은 동쪽에 있는 나무도 아니요 서쪽에 있는 나무도 아니라 그 기름은 불이 닿지도 아니하나 더욱 빛나 빛 위에 빛을 더하도다 하느님은 그분이 원하는 자를 그 빛으로 인도하시며 사람들 위에 예증을 보이시니 하느님은 모든 것을 아심으로 충만하시노라. 쿠란 24- -누르()

 

빛 위에 빛을 더하도다

[빛으로 인도 광명송]

 

 

 

 

- 성찰 광명송

 

 

어제 연구소에 흰두루님이 오셨다. 비대면 시간이 길었기에 오랜만이었다. 대화중 흰두루님 안에 잠자는 하느님이 있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사람 안의 빛이 하느님에서 온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인생들이 빛을 잊고 살게 되면서 하느님 주신 본래의 밝기를 잃게 되고, 남은 빛조차 비활성 상태이다. 그러니 잠자는 하느님이다.

 

‘잠자는 하느님'은 한영애 노래의 가사이다.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주세요'라고 노래한.

흰두루님 안에 잠자는 하느님이 있다고 말한 것은, 빛이 함께 해 있으니 그 빛이 깨어나 활동하면 좋은 일이 되겠다는 말씀이었다. 그래서 빛세상 카페에 있는 글들을 찾아서 읽어보고 그중에서 골라 흰두루님의 빛 이야기를 해보는 것은 어떠냐는 권고 말씀을 드렸다. 가진 재능을 빛세상 일에 써달라는 부탁을 드린 것이었다. 까페에는 필자가 진공빛에 관해 말한 글들이 있는데 꿰지 않은 구슬처럼 흩어져 있는 것이고 좀 다듬어질 필요가 있는 데도 있다. 그래서 누가 정리를 좀 하면 더 보기좋은 교재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 작업을 하다보면 본인 자신도 진공빛이 무엇인지 정리가 되고 공부가 더 세밀해지고 깊어질 것이다. 

​​

빛운영에 참여하고 광명송한 분들은 다 진공빛이 밝으시다. 지구상의 그 누구보다 밝은 빛을 띠었다. 그러나 밝은 빛을 띠게 된 것이 끝이 아니고 우리의 자성인 순수의식과 빛 사이의 간격이 사라지는, 진정한 합일이 일어나도록 순수의식으로 깨어 주의를 진공에 기울이기를 계속해야 한다. 그리하여 빛이 자기화되어서 생각과 행동이 빛에서 일어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손님이 왔는데 그런 줄을 모르고 자기 일에 바쁘면 손님은 잠시 기다리겠지만 손님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하느님은 진공이시다는 앎에서 진공빛은 곧 성령이니, 나를 찾아온 성령을 뻘쭘하게 세워둘 일이겠는가! 하필이면 이 시대를 비추고 나를 찾아 온 까닭이 무엇인지, 빛에게 물어볼 일이다. 

 

2019년에 흰두루님 글에서 다음 문구를 얻어 광명송을 만들게 되었다.

 

돌아보면 모두가 하나인 것을

고요히 비추어 바라봅니다

[성찰 광명송] 2019

 

 

 

- 늘해랑 광명송

 

 

대화중에 늘해랑이 본태양의 빛과 어울어져서 먼지까지도 함께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덕경의 한 구절을 말하면서 자신의 빛운영자 마음을 말한 것이다.

도는 만물의 근원이지만 도 그 자체는 근원이 없는 것이다.

도는 텅 비어 있지만 거기에 작용을 가해도 절대로 차지 않는다. 심원하기가 만물의 조종인 듯하다.그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해결하며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한다. 맑고 투명하여 잘 보이지 않지만 항상 존재하는 것만 같다. 나는 그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하느님보다 먼저 있었던 것 같다.”

도덕경의 이 말에서 和其光 同其塵(화기광 동기진)‘을 선택해 광명송을 만든다.

 

빛과 어우러져 먼지까지도 함께한다
[늘해랑 광명송]

 

 

 

- 달궁광명송

 

군계일학(群鷄一鶴)‘은 하나의 학이 닭의 무리중에 있는 상황이라고 빗댄 말이다.

이 상황의 반대로, ‘질라라비 훨훨은 학이 훨훨 날개짓해 하늘을 나는 것, 곧 우화등선(羽化登仙)을 가리키고자 한 말이다.

 

질라라비 훨훨은 인간에게 사육당하며 나는 법을 잃어버린 닭이 본성을 찾아 자유와 해방을 향해 훨훨 날개짓을 하며 날아오른다는 뜻. ‘닭인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학이더라하고 깨달아 본성의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것이다.

 

박차고 날아올라야 하는 곳은 사회적인 공간인 때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본성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다. 군계일학인가 싶은 인사가 자기가 닭인줄로 알며 닭장 속에서 닭들의 우위에 서는 지위를 누리며 안주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질라라비 훨훨은 이런 우울한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달궁’(達宮)이라 부른 것은 천궁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삼일신고 천궁훈에 하늘은 하느님의 나라다. 여기에 천궁이 있어 하느님이 뭇 신령과 모든 철인들이 모시고 있는 가운데 계신 곳으로 지극히 상서롭고 광명한 곳이라고한 것에서 대길상 대광명처라고 한 말에서 딴 것이다. 참하늘·하느님은 진공이시다는 앎에서는 이러한 의미의 천궁은 광명 세계인 진공의 세계에서도 중핵(中核)인 곳을 말한 것이게 된다.

 

질라라비 훨훨

[달궁 광명송] 2019

 

 

 

 

- 불퇴전 광명송

 

 

빛으로 다가서는 진전이 이루어져 가는 것에는 고초가 따른다. 이미 들어 있는 습관에서 떨어져 나온 진행이니 말이다. 주변은 빛을 알지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뿐이다. 그래서 혼자 가는 길이다.

 

나고 죽는 일과 사는 일이 다 의 하는 일인데, 를 객관하는 바라봄이라니!

 

여정의 끝은 자유다 / 그 전까지는 인내다 / 나 있다는 견해 없이 / 온갖 선행 다하면 / 진공 성분 빛의 꽃이 / 걸음마다 피어난다

 

이 글은 금강경 제5 '묘행무주'에 대한 예찬시로 쓴 것인데, 빛으로 통한 길을 퇴보하지 않고 전진해가기로 각오를 다지자는 뜻으로 [불퇴전 광명송]이라 이름을 달아 광명송으로 만든다.

 

진공 성분 빛의 꽃이

걸음마다 피어난다

[불퇴전 광명송] 2019

 

 

 

 

- 축복 광명송

 

 

우주배경복사에서 진공 성분 빛을 포집해 이를 빛운영의 씨앗으로 사용중이다. 최초 획득한 빛을 최초의 원본으로 하여 이것의 사본을 무수히 생성하면 그만큼 밀도가 높은 진공빛이 발현한다. 이 우주 자연계에 일찍이 존재한 일이 없었던, 전혀 새로운 밝기의 진공빛의 광명이 현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게 하는 것을 빛운영이라 한다.

 

진공빛은 그 자체가 모든 것을 아는 지성이고, 인생의 빛으로 향한 마음의 요청에 응답하는 자비의 빛이다.

 

모든 것이 진공에서 나고 모든 것 안에 진공이 있다. 사람에 복된 은사와 선물도 하느님 자리의 빛, 진공빛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빛이 응답해 뜻을 이루어주는 이 기적 앞에서 무엇을 요청할 것이냐. 밝은 이는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하지 않는다. 그는 밝음에서 사무친 지혜로 빛이 하는 일 그 자체를 희망한다. 그리고 다만, ‘이 사람에게 밝아지세요!’ ‘이 장소에 밝은 빛이 임하세요!’하고 빛에게 요청한다.

 

밝아지세요

[축복 광명송]

 

 

 

 

- 중일 광명송

 

 

中一(중일)’은 천부경에서 제일 핵심이 되는 말씀인 본심본태양앙명인중천지일(本心本太陽昂明人中天地一)’이라 한 것이 말한 중일이다. 中一안의 하나라는 뜻이 있어서 이 말은 곧 '내 안의 빛'이라 한 말이 된다.

 

이렇게 읽으니 앙명인중천지일은 예수께서 네 안의 빛이 어둡지 아니한지 보라고 한 것과도 위미 상통해서 이렇게 읽으니 참 좋은 느낌이다. 그래서 모두가 쓰는 광명송이 되게 한다.

 

내 안의 빛

[중일 광명송]

 

 

 

 

- 묵상 광명송

 

 

명상은 삶에 분산되었던 마음에 마음의 본래 자리로 돌아와 고요히 깨어 있는 행위이다. 이러한 명상에 묵묵히 임한 것이 묵상이다. 이런 저전 말을 걸고 무엇인가를 요청하며 하느님을 부려먹는 것. 밝은이는 기도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바라는 바를 비운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로 하나아가는 것. 그것에 세상 때가 묻지 않은 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빛이 밝은이의 조용한 명상을 비추게 된다. 밝은이의 그러한 명상은 반지처럼 단순하고, 반지의 상징은 등불처럼 선명하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난 네가 조용할 때가 좋아>중에서 등불처럼 선명하게, 반지처럼 단순하게라는 싯귀를 얻게 되었다.

 

네 침묵으로 너에게 말할 수 있게도 해 줘. / 등불처럼 선명하게, 반지처럼 단순하게. / 너는 별빛 가득 채워진 고요한 밤 같아. / 네 침묵은 별로 돼 있지. 멀고도, 단순해.

시에 이처럼 노래되는 삶은 그 자체가 묵상에 가까우리라.

 

 

등불처럼 선명하게 반지처럼 단순하게

[묵상 광명송]

 

 

 

 

- 새벽 봉우리 광명송

 

 

봄날의 산사에는 꽃이 싸락눈 같고 / 이름 모를 새소리 낮잠이 한창 달다 / 만덕의 신통 광명을 증명할 길 없는데 / 하늘에 꽂힌 새벽 봉우리 쪽보다 더 푸르다. 경허선사

 

시인(경허)광명의 현존을 마주해 있다. 그러나 인생들이 무명하여서 이 빛이 존재하고 행동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이 빛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해주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대로 산봉우리가 새벽 하늘에 닿은 것을 같이 볼 따름.

 

하늘에 꽂힌 새벽 봉우리

[새벽 봉우리 광명송]

 

 

백순임 명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