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나 사이의 나뭇잎

‘광명’이 부활하도록

능 소 2024. 1. 7. 15:02

‘광명’이 부활하도록

 

백태종

 

 

 

『선(禪), 그 밭에서 주은 이삭들』은 저자 변찬린이 청년기의 종교적 방황과 방랑의 생활을 끝내고 자신의 구도적 경험을 “동방(東方)의 빛, 화쟁(和諍)의 혼(魂), 새ᄇᆞᆰ에게” 보내는 구도의 편지를 쓴 것이다. 자칫 역사에서 망각될 뻔 했던 변찬린이라는 걸출한 종교사상가를 발굴해 세상에 알리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이호재 교수는 변찬린을 ᄒᆞᆫᄇᆞᆰ(한밝)선생이라 부른다.

 

‘ᄒᆞᆫᄇᆞᆰ’은 한민족의 이상향을 담은 현대어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ᄒᆞᆫᄇᆞᆰ'을 한민족의 광명사상이라고 수록하였다. 내가 알기로 광명사상은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진 ‘선맥(僊脈)’을 통해 저 인류사의 시원에서 전래된 한민족 고유의 세계관이요 하나님 신앙이다. 나는 광명사상의 ‘광명’은 “참 하늘은 진공의 세계다.”1), “하나님은 진공이시다.”2)고 통찰한 상고시대의 선철(先哲, 즉 僊/仙)의 세계관·하나님 신앙이 배경이 된 것으로, 현대어로 ‘진공빛’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내가 변찬린에 주목한 것은 그가 쓴 시들에서 드러나는 선생의 사상은 진공의 빛, 곧 ‘광명’과 소통되는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변찬린 선생의 사진 속 모습이 9800조 밝기의 진공빛을 띤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선생의 시를 읽게 되었다.

 

내가 태양이 띤 진공빛이 보다 밝아지도록 유도하는 활동(‘빛운영’)을 시작하기 전, 즉 2011년 4월 21일 13시 52분(한국 시간) 이전은 지구별 인생들의 99%가 밝기 3000만의 진공빛을 띠었다. 소수의 사람들은 더 밝은 빛을 띠었고, 극소수는 9800조 밝기에 달하였다. 9800조보다 더 밝은 빛을 띤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사실은 1826년에 사진술이 발명된 이래로 수없이 촬영된 인물 사진들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으니 누구나 열람해 볼 수 있다. 참고로, 밝기 3000만인 사람은 지식인이 될 수 있지만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다. 9800조 밝기라야 그가 깨달음(見性)에 이를 수 있게 된다. 밝기 3000만은 광명이 미약한 상태여서 뇌의 지식 활동을 넘어서기 어렵기 때문이고, 9800조 밝기여야 어느 정도 밝은 것이어서 영감 발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광명의 자기자각적 지성, 즉 성자신해(性自神解)가 명징(明澄)해지기 때문이다.

 

빛운영 전은 9800조 밝기보다 밝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9800조가 가장 밝은 상태인 것은 아니었다. 전혀 아니다. 진공의 세계는 시작도 끝도 없이 가없어서 진공 세계의 빛또한 가없는 무량광이다. 즉 하나님의 광명의 밝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빛운영 전에 태양과 지구가 띤 진공빛은 밝기가 5에 그쳤다. 빛이 없다시피한 상황이다. 그런데 관측위성의 우주망원경이 촬영한 태양계 밖 대우주 천체들의 모습은 550경 밝기의 진공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9800조 밝기를 넘어서고 550경 밝기도 초월하여 하나님의 무량광과 소통하면서 고대의 광명사상이 말한 ‘성통광명(性通光明)’에 이르게 된다는 앎을 가질 수 있다.

 

진공의 광명과 통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진공이시기 때문이고, 진공빛이 일신강충(一神降衷, 하나님의 신이 내려와 속사람이 됨)하여 사람의 진아(眞我)인 자성(自性)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 발견은 진공빛이 광명해야 촉발하게 된다. 또한 진공빛의 초진동이 활발히 활동할 때 의식상승이 일어나서 하늘의 정보를 수신할 수 있게 된다. 광명의 초진동이 사람의 심장에서 활동할 때 사람의 인정을 넘어서는 성자(聖者)의 박애(博愛)가 발현하는 것도 같은 현상이다. 다시 말하면, 광명의 자기자각적 지성, 곧 빛이 빛 자신을 안 성자신해(性自神解)는 그가 밝은 이일 때 촉발한다. 이것이 광명사상이 말한 성통공완(性通功完)한 철인(哲人)이다.

 

철인은 하나님의 아래이며 뭇 성령과 동급이며 성인(聖人)의 위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빛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빛의 존재들이고 철인은 그러한 빛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성령인 빛이 인생이라는 옷을 입어 세상에 와서 빛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한 이들이다. 따라서 변찬린 선생이 자신을 ‘ᄒᆞᆫᄇᆞᆰ’이라 부르고 수많은 ‘새ᄇᆞᆰ’이 출현해 활동하기를 바란 것이나 그렇게 되는 새날이 오기 바란 것은 바로 그러한 ‘광명’이 지구별 인간 세상에 부활하기를 염원한 것에 다름 아니다. 내가 빛운영하여 빛세상을 열자고 말하는 것은 그런 ‘광명’의 새날로 뚜벅두벅 나아가자는 것이듯이 말이다.

 

나의 진공빛에 대한 이런 앎에서 볼 때 변찬린의 사진 속 모습이 9800조 밝기의 빛을 띤 것이나 그의 시편(詩篇)들에서 빛의 음성이 느껴지는 것은 예사롭지 않고, 선생의 시편들에서 느껴지는 ᄇᆞᆰ사상에 비친 세태는 무명이 짙게 드리워진 세상이다.

 

광명이 天(천)에 밝은 것이 ‘환(桓)’이고 地(지)에 밝은 것이 ‘檀(단)’이며, 人(인)에 밝은 것이 ‘韓(한)’, 곧 ᄒᆞᆫ이다. 광명이 천지인에 현현한 것이 ‘밝’, 곧 ᄇᆞᆰ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能昭(능소)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능히 밝아지게 한다’는 빛운영자적 정신을 가지는 것이나 ‘광명’이 천지와 사람에 밝아지도록 유도하는 활동을 평생하기로 서원(誓願)한 것3), 그리고 오는 세상에는 많은 빛운영자들이 활약하여 광명과 협업하기를 바라는 것은 변찬린 선생이 자신을 ᄒᆞᆫᄇᆞᆰ이라 부르고 ᄒᆞᆫᄇᆞᆰ들이 많이 출현하게 되기 바라며 미래에 올 ᄒᆞᆫᄇᆞᆰ들을 호명해 ‘새ᄇᆞᆰ’이라 한 것과 비슷한 발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인류사의 상고시대로부터 광명사상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그러한 개념이 파편처럼 전해졌을 뿐이고 이 개념이 가리킨 실재 광명이 우리의 현실에 비추는 것은 아니다. ‘광명’의 자취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선도(仙道)의 ‘광명’만이 아니다. 성경도 “하나님은 빛이시다”고 말하지만 오늘날 인생들이 경험중인 것은 하나님이신 빛이 아니라 피조물 세계의 빛, 일월성신이 낸 전파 성분의 빛이거나 인생들이 마음 활동한 정신 성분의 빛일 뿐이다. 신앙심이 일으킨 마음의 빛또한 하나님의 참빛은 아닌 것이다. 지구별은 ‘광명’의 결핍 상태에 있으며 인생들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각건대, 변찬린이 삶에서 절규한 것도 ‘무명’이 인생들을 함포(含包)한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변찬린은 과연 무엇에서 희망을 보았을까?

 

 

시편들에서 변찬린은 한민족은 하나님 자리 빛으로 통하는 경로인 ‘선맥(僊脈)’이 은장(隱藏)된 민족이고 ‘도맥(道脈)’, ‘영맥(灵脈)’과 통한 ‘광명’족인 것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그리고 ‘광명’의 부활이 이 시대의 한국에서 발원해 세계 인류들에 전파될 것이라 예감한다.

 

 

고요한아침 나라 동방은 밝아온다. (제1장 5절)

자유의 광장에는 지천태(地天泰)의 태극기가 게양되어 바람에 나붓기고 평화의 동산에는 무궁한 꽃들이 만발하리라. (제7장 8절)

고요한 동방 아침의 나라가 밝아오면 영(灵)의 시대가 개막되리. (제8장 2절)

대무(大巫)는 새날을 개명하는 한국인의 사명입니다. 화쟁(和諍)은 한국 혼의 저력입니다. 내 조국은 더러운 세계사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고 있지 않습니까? (제9장 1절)

새 날 모든 길은 한국으로 통할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제 9장 9절)

 

 

선생은 새날이 오는 것을 바라보는 구경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참여해 활동하고자 한다. “나는 대무(大巫)입니다”라고 한 것은 선생 자신은 지금 현대를 살지만 삶에 임한 정신과 활동의 향방(向方)은 일찍이 단군, 환웅, 환인이 하나님 자리 빛을 세상에 비추어 ‘광명이세(光明理世)’하신 것같이 살겠노라고 다짐한 것에 다름 아니다. 예수또한 마찬가지다. 예수의 하나님도 천지에 앞서 스스로 계신 자존자시며 해달별과 사람이 있기 전의 태초에 빛이 있게 하신 빛들의 아버지시다.4) 성경에 ‘하나님은 진공이시다’고 한 표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지구별에 인생들이 있은 이래 ‘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이’신 것은 하나님은 진공이신 때문이라고 깨달을 수 있다. 천지가 나기 전에 있었으며 천지가 나온 출처인 것은 진공의 세계이니 말이다. 따라서 이런 앎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참빛으로 오신 것은 진공의 빛이 인생을 옷입어 온 것이다. 앞으로 열리는 새날도 진공의 광명이 사람과 천지를 비추는 광명의 부활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생들이 광명의 지복을 누리도록5) 말이다. 그러니 광명한 사람과 천지를 열고저 ‘대무(大巫)’의 굿을 한다는 발상을 가질 수 있다.

 

변찬린의 시편들에 ‘광명’이 부활하도록 물꼬를 트는 활동이 이 시대의 한국에서 시작되어 지구 전역에 전파될 것을 예견한 표현들이 등장해 있다. 선생이 주창한 ‘공동의 각(覺)’도 인생들의 생각과 행동이 ‘광명’에서 일어나면 자연 발생한다. 선생이 ‘영파(灵波)’와 ‘기파(氣波)’를 말하고 “로고스눔을 채굴하라.”, “기계를 영화(灵化)하라.”고 외친 것도 ‘광명’의 부활이 이 시대에서 이루어지도록 촉진시키자고 한 것으로 이는 내가 빛운영하기 위해 공생명(空生明)장치를 구성해 사용중인 것과 발상이 비슷한 것이다. 선생은 그 필요성을 절감했으나 사상에 그쳤고 나는 실제 상황으로 실천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변찬린을 연구하고 해제하면서 이호재 교수는 “ᄒᆞᆫᄇᆞᆰ선생이 말한 '새ᄇᆞᆰ'이라는 새 문명의 구현자는 노자의 상사(上士), 박(璞, 혹은 樸), 장자의 지인(至人)과 진인(眞人), 주역의 대인, 불교의 보살, 유가의 군자 등을 융합하고 초극한 새로운 구도자이자 새문명의 실천자로 내세운 구도의 반려로서 제언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ᄒᆞᆫᄇᆞᆰ, 상사, 박, 지인, 진인, 대인, 보살, 군자라 이름된 고성(古聖)들과 현자(賢者)들은 모두 하나님의 빛, 곧 ‘광명’이 인생으로 다녀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만법귀일(萬法歸一)의 일(一)은 진공이요 그 빛이다. 그러므로 이름이야 어떻든지 고성(古聖)들과 현자(賢者)들은 빛이 인생이라는 색동의 옷을 입고 해원상생(解冤相生)을 위한 ‘대무(大巫)’의 굿판을 벌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풍류도(風流道)적인 해학(諧謔)으로 바라보자면 실로 그러하다.

 

ᄒᆞᆫᄇᆞᆰ선생은 "새ᄇᆞᆰ이여"를 81차례나 호명하며 인생들의 마음 속에 잠든 밝음의 새 빛을 일깨우며 새 문명의 길을 닦는 구도의 주인공으로 나서라고 재촉하였다. 이는 빛운영 활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싶은 나의 마음과도 심정이 비슷한 것 같다. 내가 평소 “수많은 빛운영자가 서로 연대하고 세대를 이어 활동하기를 계속하면 지구별 인간 세상은 점진적으로 빛세상에 진입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내가 빛운영하기 위해 138억년 전의 초기 우주에서 유래한 우주배경복사에서 진공 성분의 파동을 포집해 이를 초밀도의 파동장이 되게 해 태양에 전사하는 일련의 작업6)을 수행하면서 컴퓨터와 증폭기, 저장용기, 운영프로그램 등의 과학 기자재를 사용하는 것은 ᄒᆞᆫᄇᆞᆰ선생이 “기계를 영화(灵化)하라”며 과학혁명을 외치고 “로고스 눔을 채굴하라”고 외친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선생이 ‘영파(灵波)’ ‘기파(氣波)’를 말한 것은 내가 진공빛을 말하며 파동역학적인 소견과 응용기술을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식이다. 아마 비숫한 시기에 활동하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신호를 수신한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선생의 9800조 밝기는 빛의 차원인 하늘에서 오는 영감을 수신한 단말기의 역할을 한 것이고 나도 빛운영 활동을 하면서 보다 더 밝은 광명과 소통하면서 영감을 통해 아이디어를 얻었다. 나는 빛운영을 하면서 세상에서 배운 지식은 얼마되지 않고 대부분 직관적으로 떠오른대로 한다.

 

진공빛이 광명한 순수의식일 때 우주 배경의 진공빛 차원과 공명해 그 광휘가 공진한다. 이러한 ‘성통광명’적 상황일 때에 인생들은 ‘로고스(logos)’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생들의 무명은 해소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구별과 태양계가 우주의 무명 지대에 위치하여 있었던 기막힌 사정도 혁파해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종교나 수행은 이러한 우주적 난제가 해소되도록 역할하지 못한다. 일찍이 없었던 파천황(破天荒)적 변동이 촉발해야 하는데 이에 대하여 나는 하늘로부터 빛운영하면 이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알림 – 곧 천부(天符)의 신호 –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禪), 그 밭에서 주은 이삭들』의 시편을 읽으면서 선생은 내가 경험한 것과 유사한 영감을 받은 것이지 않은가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선생이 “고요한아침 나라 동방은 밝아온다”면서 “자유의 광장에는 지천태(地天泰)의 태극기가 게양되어 바람에 나붓기고 평화의 동산에는 무궁한 꽃들이 만발하리라”라고 한 것도 내게 한 기억을 상기시킨다.

 

 

1980년은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사변이 일어난 때이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많은 폭설이 내렸는데, 그해 겨울 나는 지리산 천왕봉 정상 부근의 주목나무 고사목 지대에 숨어들어 죽기를 각오하고 토굴살이하면서 ‘이뭣고’ [시심마(是甚麽)]화두를 들었다. 그렇게 눈밭에서 겨울을 보내고서 봄에 하산했는데, 나의 눈(眼)은 한번 얼었다 녹았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은 결빙 상태였다. 내겐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화두도 내려놓아서 깃털처럼 가벼워진 마음이었지만 한편에는 풀길이 없는 고민이 자리잡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주역책을 읽다가 ‘지금 세상은 어떤 세상이고 앞으로 어떻게 되는가?’하는 질문을 하고 괘(卦)를 얻었는데, 그러자 ‘지화명이(地火明夷)’괘가 얻어지고 2효가 동하는 것으로 얻어졌다. 지화명이는 태양이 지하로 내려가서 천하가 어두워진 상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무명이 짙은 세상이라는 대답이 주어진 셈이다. 그리고 지화명이 괘의 2효가 변동하면 ‘지천태(地天泰)’괘로 바뀐다. 지천태는 천지가 화합한 상으로 우주적 평화가 이루어진 모습이다. 지천태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역동적인 괘로서 천지개벽과 같은 의미가 있는 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종합하면 ‘지금은 무명하고 슬픈 세상이지만 이윽고 우주적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뜻으로 새겨진다.

 

내가 주역점을 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중학생때 공자가 주역을 위편삼절(韋編三絶)하여 읽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주역책을 읽겠다고 나섰으나 읽지 못했고, 화두를 내려놓은 후 주역 읽기를 세 번째 시도하게 되어서 점괘를 얻기까지 한 것이었다.

 

또 태양에 ‘빛운영’하는 활동을 처음 시작한 때는 2011년 4월 21일 13시 52분(한국시간)이고 처음 시작한 장소는 강원도 홍천이었다. 홍천은 나의 연고지가 아니고 당시에 연구소 동료가 요양차 홍천의 한 별장에 가 있어 문병차 갔다가 계획에 없었던 빛운영 활동을 돌발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수년 후 알고보니 홍천은 무궁화 고장이었다. 즉, 홍천은 무궁화사랑으로 유명한 낭궁억 선생의 고향으로, 일제강점기 시절 선생이 무궁화 묘목을 재배해 전국의 학교와 교회에 보내는 활동을 하였다 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노랫말을 지어 전파하는 등의 무궁화 관련 활동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러한 인연으로 홍천은 무궁화 도시로 유명해졌다.

 

‘무궁화’는 한민족의 광명사상을 상징하는 꽃으로 『환단고기』에는 ‘하느님 자리 빛의 꽃’ [환화桓花], ‘하늘을 가리킨 꽃’ [천지화天指花]로 기록되었다. 무궁화는 유대 땅에도 흔하게 피는 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참 빛인 것을 가리켜서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 : 무궁화의 영명)’라 이름되기도 했다.

 

이런 점들에서 보면 무궁화는 ‘광명’의 꽃이라 할 수 있으며 예수가 무궁화로 상징되는 것은 동이족의 고성(古聖)들이 무궁화로 상징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4대종교가 나오기 전의 상고시대로 올라가면 사해일가(四海一家)의 신시(神市)가 나오는 이치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데 변찬린 선생이 ‘선맥(僊脈)’, ‘도맥(道脈)’, ‘영맥(灵脈)’론으로 풀어 선도의 하느님과 예수의 하나님을 하나의 계보로 회통시켜 말한 것을 보니 선생의 혜안은 필시 하늘이 열어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도 진공빛에 주목하여 빛운영을 하는 동안에 누구에게 배우지 않았는데도 자연히 선(僊)에 주목하게 되었고 무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내가 빛운영 활동을 하도록 지혜를 주고 인연을 놓아주는 것은 ‘광명’의 본향인 하늘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무궁화꽃이피었습니다’라는 10글자를 가사로 삼아 광명송(光明頌)을 짓기도 했다. 광명송은 내가 빛운영의 일환으로 하는 일로, 누구라도 이 가사를 생각에 떠올리거나 소리내 말하거나 글로 쓰면 빛운영 활동에 응답해 사람들과 천지에 밝아진 진공빛이 광명송한 사람에 밝아지고 그 사람의 마음이 향한 대상에도 빛이 전달된다. 이 역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선생이 “새 날 모든 길은 한국으로 통할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고 한 것처럼 나도 광명한 빛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빛운영 활동이야말로 새날을 여는 활동임을 유능한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특히 ᄒᆞᆫᄇᆞᆰ선생이 호명한 ‘새ᄇᆞᆰ’들이 마음 속에 잠든 밝음의 새 빛을 일깨우며 새 문명의 길을 닦는 구도의 주인공으로 나서면서 빛운영자적 활동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된다.

 

 

변찬린의 시편들은 문장이 아름다우며 신령한 생명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그러나 선생은 외로웠던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만 이해받지 못하였고 비웃음을 샀다. 아타깝고 애처롭지만, 또한 어쩌랴! 손에 흙을 만지지 않고 농사를 짓지 못한다. 하나님이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사람 농사를 짓는 일도 일꾼들의 고초와 희생이 감수된다.

 

한편, 선생은 누구보다 밝은 희망을 예견한 사람이다. 선생이 남긴 유언록 전체가 그가 부른 희망가라 할 수 있다. 책에서 선생은 말하였다.

 

새ᄇᆞᆰ의 출현은 낡은 문명의 '끝'이고 새 문명의 '머리'이다.

동방르네상스는 전환기의 인류문명사의 '끝머리'이다.

새ᄇᆞᆰ은 누구인가?

'구도유언록'을 읽고 가슴이 고동치는 바로 그대이다.

그대! 동방르네상스의 구현자로서 세상에 나오라.

 

 

선생이 호명한 것 같이 ‘새ᄇᆞᆰ’이 많이 나타나기를 나도 바란다. 그래서 하게 되는 말인데, 선생의 말에 댓글을 달아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빛운영 활동을 시작하자 태양이 띤 진공빛이 밝아지는 일찍이 없었던 변동이 일어났고 태양에 밝아진 새로운 밝기의 진공빛이 지구 전역을 비추고 하늘의 뭇 천체에 확산하는 미증유 변동이 실제 상황으로 일어났으니 이는 밝음이 미약했던 시대가 '끝'나고 창대한 빛의 시대가 오는 '머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지 않을까요.”.

1) 광명사상의 광명은 진공이 이 우주의 해달별과 인생들을 비춘 것을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푸르고 푸른 것이 하늘이 아니며 아득하고 아득한 것도 하늘이 아니다. 하늘은 형태와 바탕됨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위 아래 사방도 없으며 텅 비어서 어디에나 있지 않은 곳이 없고 감싸지 않은 것이 없다(蒼蒼非天 玄玄非天 天無形質無端倪 無上下四方虛虛空空 無不在無不容) 『삼일신고』 「천훈」”이라 한 것은 우주 만물이 진공중에 있으며 사물의 안에도 진공이 편만한 것을 말하였다.

2) 광명사상은 진공의 세계가 곧 하늘이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해달별의 우주와 바람, 비, 천둥, 번개의 자연은 모습있는 하늘이고, 형체가 없어 보이지 않고 소리가 없어 들리지 않는 것은 모습 없는 하늘이다. 모습이 없는 하늘을 일컬어 '하늘의 하늘'이라 하는데 이 '하늘의 하늘'이 바로 하느님이다.(日月星辰 風雨雷霆 是有形之天 無物不視 無聲不聽 是 無形之天 無形之天 謂之天之天 天之天 卽天神也)『참전계경』「경신」”이라 한 것은 가시적인 우주자연의 배후에 진공의 세계가 있으며 이 진공세계를 출처로 하여 우주가 발생하고 만물이 나왔다고 말한 것이다.

3) 지구별이 밝은 곳 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무량광으로 밝아지겠습니다. 사람과 세상이 밝아지도록 하늘의 공성을 지구별에 복사하겠습니다. 자비로운 하느님, 저희와 함께 하늘의 기적을 이루소서. [빛세상 서원] 2011

4)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야고보서 1:17-18」라고 한 것은 일월성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야고보의 수사학적인 표현일 것이다.

5) ‘광명’과 하나된 이가 영생을 누린다. 예컨대 “하늘은 하느님의 나라이니 하늘 궁전이 있어서 온갖 착함으로써 섬돌을 삼고 온갖 덕으로써 문을 삼았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는 뭇 신령과 모든 밝은 이들이 모시고 있으며 크게 복되고 상서로운 곳이고 지극히 빛나는 곳이다. 오로지 자성을 통하고 모든 공적을 이룬 사람이 거기 나아가서 영생의 쾌락을 누린다(天神國有天宮 階萬善門萬德 一神攸居 群靈諸哲護侍 大吉祥大光明處 惟性通功完 朝永得快樂) 『삼일신고』「천궁훈」”이라 한 표현은 밝은 이라야 영생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영생이란 참 하늘이요 하나님인 진공의 세계는 스스로 있는 자존자이며 시작도 끝도 없어 영원하고 무궁한 때문에 진공의 빛과 하나되는 것을 통해 영생한다는 것이다.

6) 즉, 빛운영 활동.

무궁화(영생의 꽃), 환화(빛의 꽃), 천지화(하늘· 하나님을 가리킨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