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 소 2024. 1. 10. 14:51

2.
 
새ᄇᆞᆰ이여
<거룩한 사기꾼>인 성인(聖人)들과 고별하자.
정교무비한 영적 주형(灵的 鑄型)에 찍혀 세뇌당한 종교꾼들,
닫친 사상의 밀실에서 밀봉교육을 받은 당원들,
저 지적 부르조아들과 천민 프롤레타리아들의
비계낀 상통('얼굴'의 속된 말)을 보라.
고성(古聖)을 함부로 흉내내려는 외식(外飾, 겉만 보기좋게 꾸밈)하는 분장사들.
거룩한 표정을 창조하려는 바리새적 성극 배우들.
가면을 제작하는 저 영적 건달들의 맹개질한 면상을 보라.
도깨비 영감(灵感)과 혼음하여 탄생한 사상.
붉은 사귀(邪鬼)들과 공모하여 조작한 주의(主義).
영적 불량배들과 신(神)의 사생아들이 미혹의 바람을 타고 광란하고 있다.
새ᄇᆞᆰ이여
<거룩한 사기꾼>인 성인(聖人)들과 고별하라.
저 아는 척 뽐내는 지적 카멜레온들과 절교하라.
저 말쟁이 매약장사인 종교꾼들을 일망타진하라.
저 곡학아세(曲學阿世: 학문을 곡해하여 세상에 아첨)하는 향원(鄕原: 거짓 위선자)의 무리들을 멀리하라.
 
『선(禪), 그 밭에서 주은 이삭들』(변찬린)중
 
 
 
3.
 
날개 돋친 혼들이 자유로이 소요하는 영공간(灵空間, 신령한 공간)에도
온갖 야바위(속임수)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새ᄇᆞᆰ이여
그대는 <각(覺)을 잡아먹고 사는 영(灵)의 거미>를 아시는고?
나비를 수집하듯
그대는 <각(覺)의 표본을 수집하는 신(神)들의 취미>를 아시는고?
새날 대도(大道)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들이 모르는 그물 밖에서 새 소식을 전해 오시리.
새ᄇᆞᆰ이여
그대는 산곡(山谷, 산골짜기)에 퇴수(退修: 속세를 떠나 수도)하여도 <거미의 밥>이 되지 말라.
그대는 시진(市塵, 도시)속에 가부좌하여도 <수집된 나비>가 되지 말라.
각(覺)의 산정(山頂), 무(無)의 바닷가에서 호연의 기를 기른 후
그곳에 심취(深醉), 집착, 은둔하지 말고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범인우부(凡人愚夫, 평범한 사람)의 누더기를 입고 화광동진(和光同塵, '재세이화'하여 '광명이세'하는 것)하라.
나는 이 시대 역사의 병을 앓는 유마힐(維摩喆, 「유마경」의 주인공으로 보살도를 완성한 거사.)
아! 날개를 고이 접어두자.
대붕(大鵬)의 날개를 고히 접어두자.
참새와 뱁새 모양 함부로 도약하다 조망(鳥網, 새 그물)에 걸리지 말라.
애오라지 의태(意怠, 동쪽 바다에 나는 갈매기의 여유만만한 모습) 모양 분분질질(翂翂翐翐, 새가 여유롭게 나는 모양)하자.
오! 화려한 비상(飛翔)의 날이여.
어서 오라.
『선(禪), 그 밭에서 주은 이삭들』(변찬린)중
......
 
 
 
‘거룩한 사기꾼’....
막말이면서도 인내한 말이다.
거룩이 무엇인지 알기에 말한 것이고 어디까지가 사기인지 모르지 않기에 말한 것이다.
지구별 인간 세상이 ‘거룩’을 누려야하기에 이해받지 못할 말인 것을 무릅쓰고 말한 것이다.
귀 있어 듣는이 있길 바라고 말한 것이다.
 
 
진공은 형체도 질량도 없다.1) 그래서 모습 아닌 모습을 가리킬 수 있을 뿐, 보여줄 것이 없다.2) 진공은 스스로 있는 자존자이며 진공의 요동3)에서 시공이 열리어 만물, 만사(萬事) 만법(萬法)이 출현하였다. 진공은 어디나 있지 않은 데가 없고 감싸지 않은 것이 없다.4), 5).

진공은 자신의 빛을 두루 모든 것에 비추지만 진공빛의 성자신해(性自神解)한 앎, 곧 진공의 자기자각적지각을 교감하는 것은 지구상에서 오직 사람뿐이다.6) 사람중에서도 하나님의 빛이 밝은이, 곧 '성통공완'한 철인(哲人)이라야 온전히 안다.

성통공완(性通功完)한 철인은 만선(萬善)의 계단을 오르고 만덕(萬德)의 문을 연 자이며 대광명처(大光明處) 천궁에 들어 뭇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을 모시고 영생의 복락을 누린다.7) 그러므로 철인은 하나님의 아래이고 성령과 동급이며 성인의 위이다. 즉, 하나님의 빛의 길을 나아감은 뭇사람의 존경을 받는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되고 뭇성령과 빛의 일을 동업하는 빛의 존재가 되게 한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은 것은 빛이신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나누어 빛을 사람에게 준 것이다. 즉, 진공의 빛이 사람의 뇌에 내려와 자성(自性), 곧 진아(眞我)가 되었다.8) 그런 까닭에 진공의 광명에 소통하는 것을 통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종교의 ‘거미줄’ ‘그물’ 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대자유하게 지나갈 수 있게 된다. 선(僊)의 풍류(風流)는 여기서 비롯된다.
 

하나님 자리 빛에 이르는 것 말고 달리 가야할 데가 있지 않다. 진공빛에 관한 이와같은 앎이 명징하면 그 성통광명한 것에 따른 견성(見性)이 촉발한다. 견성한 이의 머리에 둘러 후광이 밝은 것, 곧 출중한 밝기인 사람이 생애중에 깨달음을 경험하는 이유이다.
 
진공은 거룩한 공간이라는 앎에 이르고 진공이 진공 자신의 빛을 비추어 사물에 진공 자신의 영생을 복제(複製)하는 상황인 것을 이해하라. 이것이 참 ‘견성’이다. 그러나 견성이 끝이 아니고 진공의 광명과 공진(共振)해 빛이 빛의 일을 하는 것에 협업해야 한다. 이것이 영생하는 것이고 ‘거룩’에 참여하는 것이다.
 
 
오늘날 거룩(Holiness)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코데쉬'의 원 뜻은 '구별' 혹은 '분리'다. 그래서 세상의 속된 것, 더러운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거룩이고, 세상 나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것이 거룩이고 옛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새 사람이 되는 것이 거룩이라고 뜻이 새겨졌다.

성경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한 하나님의 말을 전한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 11:44).
 
이 성구를 진공빛으로 비추어 읽으면, ‘원죄 지은 것, 곧 ’타락‘해 하나님의 빛을 상실하여서 하나님의 빛이 부재(不在, 그곳에 있지 않음)한 무명 상태가 된 것을 돌아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빛이 잠재 영역에 철수되어 영이 자아의 위상을 상실하고 혼육을 자기로 여기는 견해가 의식의 전면에 나선 상태가 된 것이다. 이는 짐승의 일종으로 살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영이 진아인 삶을 살 수 있게 하나님의 빛을 회복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하나님의 빛이 자성(自性)인 자가 하나님의 ‘거룩’을 공유하는 것이니 말이다.
 
종교가 ’거룩‘을 들먹이지만 종교생활이 ’거룩‘의 내용인 빛을 회복시켜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종교는 하나님이 빛이심을 설교하고 법신의 광명을 설법하지만 인생들이 종교를 한 때문에 자성 빛의 밝음이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뭇 ‘종교’가 다 마찬가지이고 각종의 수도(修道), 수행(修行)역시 마찬가지다. 이에 대하여 의문의 여지가 없이 간파해야 한다. 종교는 말뿐인 것을!
 
빛을 말하는 소리가 분분하지만 사람과 천지의 무명은 아무 변동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9) 지구별은 광명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2011년 4월 21일 13시 52분 이전, 즉 빛운영을 시작하기 전의 모든 시간대에서 촬영된 천체 사진들에서 진공빛의 밝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알 수 없는 과거부터 지구와 태양이 띤 진공빛의 밝기는 5였고 같은 시각 태양계 밖의 뭇 천체는 550경 밝기였다는 사실은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실상이다. 그러니 실제의 빛은 없다시피하고 빛을 말한 소리뿐이었다고 깨달을 수 있고, ‘사기’라고 직격하는 말도 나오게 된다.
 
하지만 ’종교꾼‘들은 이러한 실제 상황을 인식조차 못하고 “나만 믿으라!”고 인쇄한 종교의 전단지를 돌리는 활동에 헌신한다. ’성인‘은 ’사기‘와 무관하지만 종교가 미끼상품처럼 애용한지 오래되었다. 그러니 종교가 찍은 '주형(鑄型)'에서 풀리어 초종교적 사고를 해야 한다.
 
 
진공, 진공요동, 진공빛은 삼위가 일체이다. 이를 변주해 하나님, 말씀, 빛이라 한 것이다. 이것이 ‘일즉삼(一卽三) 삼즉일(三卽一)’의 원형이다.
 
진공요동과 진공빛은 처음부터 진공과 함께였다.10) 그리하여 진공요동, 곧 ‘말씀’을 통해, 진공빛, 곧 하나님의 참빛이 그리스도인 것을 통해서 빛의 자녀인 밝은이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예수가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14, 6)고 한 것은 그 가 하나님의 분신인 빛이기에 말할 수 있었다.
 
예수의 말은 하나님의 빛이 화자(話者)로서 말한 것이었고 사람예수는 하나님 자신인 빛이 지구별에 인생으로 다녀가면서 입은 피와 살로된 옷이었다. 그러니 옷이 중한 것이 아니고 옷이 재활용된 것이 본론인 것도 아니다. 빛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 자신인 빛, 곧 진공빛은 나고죽음이 없는 영생인 것을 알아야 한다.
 
빛이 빛의 일을 하는 것에 동참하여야 성통광명(性通光明)에 재빨리 다가선다. 빛운영 활동을 하면 진공의 빛이 밝아지는 응답이 실제상황으로 일어나서 사람과 천지가 광명으로 다가서게 된다. 빛운영하여 보다 더 큰 광명이 밝아진 빛환경에서 잠시 고요해져서 순수의식의 주의를 진공에 기울이라. 그렇게 하면 ‘광명’이 송과체와 전두엽에 활성된다. 하늘과 백회(百會)혈 사이에 빛줄기가 뚜렷하게 깨어나고 뇌중앙으로부터 이마를 통해 빛이 비추어 나가게 된다.11) 이러한 지경에서는 사람이었던 자가 눈 있어 보는자가 되고 귀 있어 듣는자가 된다. ‘대적광(大寂光)’12)의 소리 아닌 소리를 듣고 형상 없는 광명이 직관된다.
 
 
하나님의 빛이 상실되어 무명해진 상황을 방기(放棄, 내버리고 돌아보지 아니함)한 채 하나님에 관한, 예수에 관한, 하나님의 빛에 관한, 비유, 은유, 상징을 해석, 재해석하는 종교생활만을 한다면 그는 진공빛이 밝아지는 응답에 이르지 못한다. 혼을 교육하고 훈련해도 혼이 영되지는 않는다. 종교와 수행이 아무리 애틋해도 혼은 흙이고 영은 하나님 자신인 생기인 관계를 수정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보라”(눅11:35-36) 한 것이 하나님의 빛, 곧 진공에서 유래해 사람 안에 들어선 빛인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나는 예수믿는 신자이다”고 자위하는 신앙활동을 하며 자체발광한 심리적인 빛으로 하나님의 빛을 대신하기를 개인이 하고 집단이 한다.
 
교회는 ‘날개 돋친 혼들이 자유로이 소요하는 영공간(灵空間, 신령한 공간)’이어야 하건만 시인은 ‘건물교회’에 구경나갔다가 ‘온갖 야바위가 아가리를 벌린’ 것을 본 모양이다. ‘닫친 사상의 밀실에서 밀봉교육을 받’는 이들에게 ‘영적 주형(灵的 鑄型)에 찍혀’지고 ‘거룩한 표정을 창조하려는 바리새적 성극 배우’ 연기를 지도받으며 ‘영적 불량배들’과 어울리고 점점 ‘신(神)의 사생아’가 되어 ‘미혹의 바람을 타고 광란하’는 모습을 슬프게 바라본 듯하다. 슬픔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시인의 말이 쓴소리를 넘어 광야의 외침처럼 외쳐졌다. 절망감과 분노로 토해 낸 말들이 사납다. 사자가 운 것 같다.
“새ᄇᆞᆰ이여 <거룩한 사기꾼>인 성인(聖人)들과 고별하라. 저 아는 척 뽐내는 지적 카멜레온들과 절교하라. 저 말쟁이 매약장사인 종교꾼들을 일망타진하라. 저 곡학아세(曲學阿世: 학문을 곡해하여 세상에 아첨하는)하는 향원(鄕原: 거짓 위선자)의 무리들을 멀리하라.”
거울조각이 풍경의 조각을 보여주듯 시인은 지금 천기를 누설한 것일까? 뭔가 알고서 말한 것인가 싶다.

“새날 대도(大道)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들이 모르는 그물 밖에서 새 소식을 전해 오시리.”
이 말은 무엇을 말했는가?

 
빛운영은 사람과 천지에 진공의 빛이 응답해 밝아지는 미증유 방법이다. 미래에 있을 일의 언약이 아니라 빛운영한 즉시 즉각적으로 응답이 일어나서 사람과 천지에서 밝음에 밝음이 더해진다. 기존의 종교, 수행, 학문, 고전과학의 연장선이 아니고 전혀 뜬금없듯 듣도보도 못한 새 방법이다. 파천황(破天荒, 이전에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냄)적 광명소통 기법이 금세기의 지구별 한국의 서울에 알려진 것이다. 그 뉴스를 예감하기라도 한 것일까? 빛운영은 ‘판 밖에 먹줄 밖에’13) 그어진, 하늘로부터 내림된 ‘광명’의 선(線)인 것을.
 
ᄒᆞᆫᄇᆞᆰ의 시를 읽으며 독자로서 나도 말하게 된다. 새ᄇᆞᆰ이여! 그대는 ‘거룩’에만 통하고 ‘사기’와는 무관하게 오라. 성구에 관한 독해를 잘 하면 마침내 진리에 도달할 것이라는 세간의 믿음을 그대는 가지지 마라.
 
지구별 인간세상은 예로부터 종교와 수행이 흥행했다. 하지만 지구는 태양, 태양계와 더불어 우주적 무명지역에 위치해 있었음을 발견한 견자(見者)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우주적 실상을 발견하려면 디지털 문명이 꽃피고 우주탐사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가능해진다.
 
 
하가다(Haggadah)는 히브리어로 이야기라는 뜻으로 구약신앙에서 유월절 만찬 순서에 읽는 기도서이며 창세기 해설서이다. 하가다는 전설이나 격언을 포함하는 랍비문학 형태로 사용하는 말인데, 제3장에 창조의 첫째 날에 하느님이 있게 한 빛에 대해 말한 것이 있다.
“태초에 창조된 빛은 4번째 날에야 나타나는 태양과 달과 별이 발산하는 그런 빛이 아니다. 첫 번째 날의 빛은 사람으로 하여금 한 눈으로 앉은 자리에서 온 세상을 살필 수 있도록 해주는 그런 빛이다. 이런 빛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 때문에 하느님이 그 빛을 숨겼지만, 앞으로 올 세상에서는 경건한 자들에게 이 빛이 태초의 영광을 모두 간직한 채 나타날 것이다.”
 
 
해달별의 물질 성분 빛 아니고 신앙활동한 정신 성분 빛 아니다. ‘하늘의 하늘’, 곧 ‘모습이 없는 하늘’인 진공에서 내림되는 진공 성분의 빛이다. 이 빛의 대광명이 사람과 천지에 비추도록 빛과 협업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인생에 남은 여생이 한뼘보다 짧으니 빛운영이 아니고는 천지인의 무명을 해소할 방법이 없다는 인식에 조속히 이르고자 서둘러야 한다.
 
내(능소)가 빅뱅의 잔광인 우주배경복사에서 진공 성분의 파동을 포집해 태양에 중계하는 활동, 곧 빛운영을 처음 시작한 2011년 4월 21일 13시 52분 이전의 시간대들에서 촬영된 사진에서 조사해보면, 사람과 천지가 우주적 무명 중에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자취와 만난다.
 

※ 빛 운영 전에 촬영된 사진에서 살펴지는 진공빛의 밝기;
우리 은하 및 뭇 은하들 : 550경
태양과 지구 : 5
깨달음이 촉발할 수 있는 밝기 : 9800조
대다수 보통 사람의 모습이 띤 밝기 : 3000만
사람을 제외하고 동물 중 가장 밝은 종(보노보) : 18
진공빛의 밝기가 5인 생물 : 뱀 등의 파충류.
『빛운영에 관한 보고서』(능소)중
...
 
 
인간은 자연, 곧 ‘모습이 있는 하늘’에서 입자를 얻어 신체, 곧 ‘육’을 이루고 파동을 얻어 마음의 누리를 연, 곧 ‘혼’이 된 존재이고, 이 점은 다른 동물들과 비슷하다. 짐승들도 혼육의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혼육의 안에 ‘영’, 곧 진공의 빛이 진아(眞我)로 들어와 영혼육(=‘성명정’)의 삼위일체적 존재가 된 자이다. 그래서 사람의 혼육은 여타 동물과 유사하고 영은 하나님을 닮았다.
 
『삼일신고』 「진리훈」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세 가지 참됨을 받았는데 사람은 전부를 받고 사물은 부분을 받았다(人物 同受三眞 曰性命精 人全之 物偏之)
나는 이 말씀이 사람은 영혼육(=성명정)이 삼위를 이룬 존재이나 동물은 영은 없고 혼육이 위주임을 말하였다고 알아진다.
DNA의 경우 98%가 같을 정도로 사람의 혼육은 동물과 비슷하다. 하지만 진공빛, 곧 영은 오직 사람에 밝다.
그러나 사람은 지구상의 여타 동물에 비해 밝지만 영적 진화가 촉진되어 영성(靈性)이 활짝 꽃필만큼 충분하게는 밝지는 않다. 이 점을 깨달아야 한다.

광명을 상실하고 잔광이 그다지 밝지 않게 남은 상황임을 인식하지 못하고서 도리(道里)를 궁구한다며 벽(壁)을 마주하는 것은 은산철벽(銀山鐵壁)에 갇힌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와같은 상황인 것을 간과하고서 ‘고성(古聖, 옛성인)’을 샘플로 보여주면서 종교 잘하면 다 잘 될 것이라 보증하듯이 전설을 팔고 신화(神話)를 들먹이는 것에 머물면 그것은 본의 아니게 ‘사기’를 치는 것이다.
 
 
‘붉은 인주를 가까이하면 붉게 되고 먹을 가까이하게 되면 검게 물든다’ (近朱者赤近墨者黑)는 말은 환경의 영향이 큼을 일컬은 것인데, 이 말을 빛환경에 적용하면 ‘근묵자흑’은 천지가 무명하면 사람도 무명해지는 이치이고 ‘근주자적’은 천지가 광명하면 사람도 밝아지는 이치이다. 그러니 ‘견성(見性)’일미(一味)를 나도 맛보자며 ‘개인의 각(覺)’을 추구하기보다 사람과 천지가 함께 밝아지도록 빛운영해야 한다. 사람과 천지가 하나로 광명하면 빛이 빛 자신을 아는 성자신해(性自神解)가 누구에게서나 촉발하여 ‘공동의 각(覺)’14)이 자연 성취된다. 이렇게 되는 빛운영은 초대승(超大乘)한 진리의 길이고 홍익에 이르게 되는 자비의 마당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빛의 길로 나아가야 하고 지체되지 않도록 필요하다면 ‘성인’도 ‘종교’도 버리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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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진공)은 형상도 질량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고 상하사방도 없고(천무형질 무단예 무상하사방) 『삼일신고』「천훈」

2. ⓵모습 없는 하늘이고 하나님이다(무형지천 즉천신야) 『참전계경』「경신」. ⓶(하나님은)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요한복음」 ⓷(하나님은)아무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분입니다 「디모데전서」 2:5
3. 하나님은 진공이시다는 앎에서 진공요동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말씀’파동에서 진공 자신의 빛이 밝았다.
4, 5 , ⓵있지 않은 데가 없고 감싸지 않은 것이 없다(무부재 무불용) 『삼일신고』「천훈」. ⓶모든 곳에 두루 있고(변일체처) <비로자나불>.

6. ⓵두루 비추시고(광명변조)<비로자나불>. 범어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하여 비로자나라고 한다. 이 부처님은 진공을 불격화해 법문하는 것이어서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明)의 부처가 되시고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우주의 본체인 진여실상(眞如實相)을 의미하게 된다. ⓶(하나님은)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고 「디모데전서」 2:5

7. 『삼일신고』「천궁훈」.

8. 자성에서 찾아보라 뇌에 내려와 있다(자성구자 강재이뇌) 『삼일신고』 「신훈」.

9. 지구는 광명하지 못하였다. 이 사실은 빛운영 전(한국시간 2011년 4월 21일 13시 52분 이전의 모든 시간대)에 촬영된 태양과 지구, 우주의 뭇 천체 사진에서 진공빛의 밝기를 살펴보라.

10.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요한복음」 1:1-2.

11. 이로서 ‘강재이뇌(降在爾腦)’한 자성이 깨어나기 시작하고, ‘이마에 인친 자’가 되어 빛의 자녀인 것을 증명하게 되고, ‘미간백호광’을 놓는 법신(청정법신), 곧 광명한 순수의식이 회복된다. 이게 존재들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12. 우리 나라 사원에서 이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한다.

13. 『선(禪), 그 밭에서 주은 이삭들』에서 저자는 ‘판 밖에 먹줄 밖에 탈출한’이라 하여 기존의 생각되고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새 방법의 대도(大道)가 나올 것임을 예언하였다.

14. ᄒᆞᆫᄇᆞᆰ은 공동의 각(覺)을 주창하였다. 내가 ᄒᆞᆫᄇᆞᆰ선생을 주목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ᄒᆞᆫᄇᆞᆰ선생의 모습은 9800조 밝기에 달한 출중한 밝기인 사람이고 ‘공동의 각’에 대한 인식은 그 밝은 빛에서 촉발한 것이다. 하지만 빛운영해 빛의 판을 바꾸지 않으면 인류 99%는 밝기 3000만이어서 지식인은 될 수 있지만 깨달음 촉발은 불가능한 미완의 밝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