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 나 사이의 나뭇잎

수선화를 품은 흰 눈처럼 고결한

능 소 2024. 1. 12. 14:00

 

수선화(水仙花)는 '물의 선녀'라 부른 것이듯이 물가에 흔히 자라지만 제주도에 자생하는 제주수선화는 한라산에 눈발이 날리는데도 여린 꽃잎을 피워서 설중화(雪中花)라 불렀다. 매화와 동백도 눈 속에 피는 꽃인 것은 같지만 수선화는 몸체가 가녀려서 시심(詩心)이 더 이끌렸는가보다.

추사의 수선화 사랑도 유명하다.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그윽하고 담백한 기풍 참으로 빼어나다.

매화나무 고고하지만 뜰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 핀 너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一點冬心朶朶圓 品於幽澹冷雋邊

梅高猶未離庭砌 淸水眞看解脫仙

 

추사 김정희의 ‘수선화(水仙花)’라는 시(詩)이다.

 

 

추사는 54세 때인 1840년 제주도에 와 8년 넘게 유배생활을 했다. 당시 한양에서는 수선화가 이국의 귀물로 여겨지며 애지중지하는 꽃이었는데, 추사가 제주에 와보니 흔하디 흔한 꽃이었다. 추사의 제주도 편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곳의 마을마을마다엔 한 자쯤의 땅에도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화품(花品)이 대단히 높은데 한 포기에 십여 송이, 대개는 팔구 내지 오륙 송이로서 정월 그믐과 2월 초에 피어서 3월까지 이릅니다. 산과 들, 밭두둑에 구름처럼 흰눈처럼 드넓게 깔려있습니다. 이 죄인의 거처 동서쪽 모두 그렇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토착민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모릅니다. 소와 말들이 뜯어먹고 짓밟아버립니다. 게다가 보리밭에 많이 자라기 때문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호미로 파내어 버리는데 파내도 파내도 자꾸 돋아나기 때문에 이것을 원수보듯 합니다. 사물이 제 자리를 얻지 못한 것이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귀한 줄도 모르도록 수선화가 흔한 것을 보게 되니 자신이 귀한 줄을 모르고 내쳐진 신세인 것같다는 감회가 일어났는가보다.

그럴만도 하겠다.

 

한편으로 수선화가 선(仙)이라 이름된 것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가 도시에서 귀히 여겨지며 살지라도 마음 한자락에 풍치 있고 멋스럽게 노니는 풍류심(風流心)을 간직하고 사는 것도 좋은 일이라 싶다. 수선화가 ‘신비(神祕)’라는 꽃말을 가지듯 말이다.

 

 

수선화의 본래 이름은 아산(雅蒜), 말하자면 ‘우아한 달래’이다. 그렇듯 아리땁다는 말이겠다. 이 꽃을 사랑한 시인들이 많아서 ‘능파선자(凌波仙子)’, ‘금잔은대(金盞銀臺)’, ‘낙신향비(落神香妃)’등으로 일컫기도 했다. 12세기 초 송나라 시인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은 '수선화 詩'의 원조라고 알려지는 시를 이렇게 읊었다.

 

 

凌波仙子生塵襪 (능파선자생진말) 물결 가르는 선녀의 먼지 이는 버선

水上盈盈步微月 (수상영영보미월) 물 위로 아리땁게 달빛을 밟아오네

是誰招此斷腸魂 (시수초차단장혼) 누가 이 애끊는 혼을 불러서

種作寒梅寄愁絶 (종작한매기수절) 찬 꽃으로 심어놓고 수심을 붙였는가

含香體素欲傾城 (함향체소욕경성) 향기 머금은 자태는 성을 기울이려 하고

山礬是弟梅是兄 (산반시제매시형) 산반은 아우요 매화는 형이라네

坐對眞成被花惱 (좌대진성피화뇌) 앉아 마주하니 참으로 꽃에 매혹되고

出門一笑大江橫 (출문일소대강횡) 문을 나서 한 번 웃으니 큰강이 비끼누나

 

* 凌波仙子 : 낙수(落水)의 여신 복비(宓妃), 중국 고대 제왕 복희씨의 딸로 낙수에 빠져 죽어서 신이 됨

* 傾城 : 성을 기울게 할 정도의 뛰어난 미색

* 山礬 : 鄭花, 키큰 나무로 봄에 향이 좋은 흰꽃이 핌

 

 

 

기원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오늘날에 인터넷에서 수선화가 1월 13일의 꽃이라고 꼽아지고 있다. 그런데 마침 사람된 성품이 반쯤은 선녀같은,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느분이 오는 1월 13일에 아들을 장가보낸다고 보낸 청첩장의 사진에 신부가 손에 든 꽃다발에 노란 수선화가 담긴 듯하여서 잠시 수선화 시를 읽게 되었다. 팔장낀 신부를 보며 환히 웃는 신랑의 모습이 노란 수선화를 품은 흰눈처럼 고결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내게는 참 좋다.

 

 

천사들아

너희가 사랑한 나라에 환히

아침 동튼다

 

 

<수선화> 사진=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