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권 : 빛의 확산/3부 1장

이사도라 던컨과 최승희

능 소 2022. 8. 12. 19:39

 

 

 

현대무용의 개척자로 불리는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 18781927)의 삶은 자신의 말대로 치열하게 그녀를 요구한 사랑예술에 바쳐진 생애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사도라를 임신한 후 냉동한 귤과 샴페인만 먹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이사도러 던컨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어머니 자궁 속에서부터 나는 춤췄다. 귤과 샴페인은 아프로디테의 음식이었으므로.”

 

아프로디테 (Aphrodite)는 고대 그리스 신화 중의 미와 사랑의 여신이다. 제우스와 디오네의 딸이라고도 하고, 또는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다고도 이야기된다. 로마 신화의 비너스에 해당한다. 이사도라 던컨은 자신을 그 아프로디테와 동일시했다.

 

이사도라 던컨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은행가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이사도라가 어렸을 때 파산을 했고, 이후 처녀와 바람이 나서 모녀를 버려서 이사도라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이사도라는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한 번도 제대로 된 무용교육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사회는 그녀의 자유분방한 춤을 감상해줄 수 있는 사정이 아니었다. 1800년대 미국 사회는 더 유럽적인 것을 고수하는 문화적 보수주의가 팽배해 있었으므로 이사도라의 춤이 춤의 전통을 파괴하는 자유분방한 표현으로 충만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1899, 20세기를 1년 앞두고 스물한 살의 가난한 3류 무용수 이사도라는 가축수송선을 타고 유럽으로 건너간다.

 

유럽에서 그녀는 님프처럼 거의 옷을 걸치지 않고 맨발로 춤을 추었고, 그녀의 춤을 보려고 군중이 쇄도했다. 그녀는 춤의 구도자와 같았다. 춤의 한 동작을 만들기 위해 수년간의 노동과 조사를 거듭하기도 했다. 그녀의 의지는 고대 그리스 무용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다. 그녀는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그리스 도자기와 조각을 보며 고대 그리스의 무용을 상상하고 재현했다.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그녀가 찾아낸 춤은 기도였다. 그녀가 보여주는 춤사위는 마치 인간이 빛을 잃고 무명으로 추락하기 전의 고결한 행동을 복원해 내는 것 같았다.

 

1927914, 프랑스 니스에서 이사도라는 최근에 사귄 젊은 남자와 드라이브하기 위해서 차에 오른다이사도라는 2년 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연하의 남자가 탐닉하던 붉은 색 긴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차에는 재즈곡 ‘Bye Bye Blackbird’가 흘러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밖에 서 있던 친구들에게 나는 멋진 곳에 다녀올 거야. 안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차가 출발했을 때 그녀의 목 뒤로 흘러내린 긴 붉은 색 스카프가 자동차 바퀴에 끼었고가녀린 그녀의 목은 순식간에 꺾여버렸다. 이사도라 던컨은 그렇게 순식간에 죽었다.

 

그런데 그게 벌써 시각적으로 우릴 사로잡는 거죠. 그러더니 조명이 싹 귀퉁이로 산같이 동그랗게 비춰요. 모두가 다 보죠. 거기에 음악이 탁 나와요. ‘봄이 왔네, 봄이 와.’ (멜로디로) ‘봄이 왔네. 봄이 와.’ 거기에 맞춰서 최승희가 초립동이 춤추죠. 빨간 옷 싸악. 첫 눈에 반해버려요.” 최승희(아이리스)

 

최승희는 월반에 월반을 거듭해 소학교를 4년 만에 수석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매우 총명한 소녀였다. 사진속 최승희의 모습이 큰 밝음을 띤 것을 보면 이해가 된다. 천재성은 빛에서 오는 것이니 말이다. 최승희는 숙명 여학교에 다니던 열여섯 되던 해에 한국에 공연을 온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고 자신의 앞날을 무용가로 결정했다. 일찌감치 개화한 집안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살았던 최승희였다. 그녀는 가족들의 축복 속에서 이시이 바쿠의 수제자로 들어갈 수 있었고, 이시이 무용단에서 가장 춤을 잘 추는 무용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최승희는 예술이 상류 계급에만 봉사하는 것을 격렬히 거부했으며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사회적이고 민중적인 무용을 좋아했다. 최승희는 1929년에 한국 전통무용에 눈길을 돌린 한국의 전통무용 속에서 백성과 어우러지는, 그녀가 생각하는 참다운 무용의 형태를 발견하고자 했다. 최승희는 이시이 무용단의 1급 무용수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귀국했다. 그녀는 가시밭길을 걷는 심정으로 현대무용의 불모지인 한국에 무용 문화를 심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그녀는 수많은 전국 각처의 전통무용 전수자를 찾아다니며 그들에게서 무용을 사사 받았고 그것을 신무용과 접목했다. 최승희는 새롭지만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무용 춤사위를 찾아내 무대에 올렸다.

 

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최승희는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위문 공연에 투입되어야 했고, 그 공연 횟수가 1백 회가 넘었다. 최승희는 위문 공연차 몽고를 돌아 다른 전쟁터로 이동하던 중 운강석굴을 방문하게 되었다. 운강석굴은 약 1500년 전에 만들어진 석굴사원으로 이 동굴에는 51천여 점의 불상이 조각돼 있었다. 최승희는 이 거대한 불교예술에서 영감을 얻어 불상의 다양한 자세를 무용으로 승화시켜 그녀의 대표작의 하나인 <석굴암의 벽조(壁彫)>를 완성했다. 이는 이사도라 던컨이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을 무용으로 재현한 것에 비교되는 일이어서 최승희는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에 비유되곤 하였다.

 

최승희는 자신이 개발한 한국무용을 세계무대에 선보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최승희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첫 해외공연을 가졌을 때는 최승희의 공연 포스터에 '재퍼니즈 댄서'라는 소개 문구가 들어가 있어 문제가 되었고, 재미 동포사회는 반일운동 차원에서 이를 격렬히 비판했다. 이 때문에 최승희의 공연은 중단됐으며, 최승희는 1년 가까이 할렘가에서 고생하다가 파리에서 시작해 구미 각국을 도는 순회공연에 나서게 되었다. 최승희의 해외공연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당대 서구의 많은 예술가들이 최승희의 춤에 흠뻑 빠졌고, 최승희가 브뤼셀, 로마, 헤이그 등 유럽 순회공연을 끝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와 대망의 무대인 예술의 전당국립극장 샤이오에 섰을 때는 관중 속에 당시 피카소, 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참석해 있었다.

 

유럽 공연의 성공으로 다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최승희는 30년대 후반 유럽, 미국, 중남미 등에서 150여 회의 공연을 해 동양의 무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되고 최승희는 남과 북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다. 최승희는 친일파로 몰렸고, 북한에 가 있던 남편 안막으로부터 강력한 요청을 받고 그녀는 19467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그러나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월북 후 얼마 되지 않아 숙청당했고, 최승희도 통치이념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말년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최승희는 일제 때는 친일을 했고, 해방 후는 월북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그에 관한 책은 불온서적 취급을 받아 최승희는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예술가였다.

 

 

 

좌측) 이사도라 던컨. 진공빛의 밝기, 5000

우측) 최승희. 진공빛의 밝기, 5000

 

 

좌측) 이사도라 던컨. 우측) 최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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